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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Oct 07. 2022

즐거운 편지- 황동규

황동규 시인은 '소나기'로 유명한 작가 황순원 선생의 장남으로 1938년 4월 평안남도 숙천에서 태어났다.

1946년 월남을 하게 되는데 본인에게는 가히 재미있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요즘 말로 웃픈일화가 있다고 하는데 그 어린 나이의 경험이지만 팔순이 넘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일이라고 한다.

그의 가족들을 태운 소달구지가 삼팔선에 도달하여 막 남녘으로 넘어갈 무렵 소련군이 세우길래 가족들은 잔뜩 긴장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련군은 자기들이 축구 시합을 하는데 인원이 모자라니 일행 중 젊은 남자 몇은 축구시합의 인원수 좀 채워달라는 황당한 제의를 했다고 한다.

하는 수없이 축구 경기를 다 치르고 나서 가던 길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당하는 절박한 심정의 사람들이야 식은땀이 절로 나는 상황이지만 지금에 와서 그 이야기를 듣는 심정은 슬프지만 어쩐지 짠한 실소가 나오는 상황에 어이가 없어진다.

그렇게 월남하여 6.25를 겪고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지금까지 살아오셨다고 한다. 당시 대학에 입학하여 전공을 정하던 때라 작가의 삶의 애달픔을 알고 있던 아버지 황순원 작가와 어머니는 내심 의대나 법대로 진학하기를 바랐으나 문학의 길만이 후회 없는 삶이 될 거라는 확신으로 지금까지도 3년 주기로 시집을 펴내고 계시다.

오늘 소개할 시는 작가 자신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연상의 여인을 짝사랑하는 마음에서 지은 시라고 하는데, 1950년대 정서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어찌 보면 황당한 내용의 시(詩) 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매력이 넘치는 '즐거운 편지'를 감상해 보자.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해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서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현대문학' 1958년 中



한국 최고의 서정 시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서정주 시인이 이 시를 '현대문학'에 추천하여 등단시킨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의 멋들어진 시(詩)이다.

그것도 약관도 안된 고등학교 2학교의 작품이라는 것에 두 번 놀라게 된다.


우선 지금도 그러하지만 '어떻게 사랑이 변해요'라는 불문율을 깨버리며 시작하는 시이다.

소위 잘나가다가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서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이 대목부터 홀딱 깨기 시작해서 마지막엔 이렇게 결정타를 날린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보면 님이 마음이 변해 떠나가던 죽어가던 변하지 않는 나의 마음을 안다면 어디서든 다시금 만날 것을 기약하는 것이 사랑에 대한 전통적인 서사라면 고등학생 서정시인 황동규는 노자(老子)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에 흠뻑 빠져 세상 모든 것의 존재 원리는 유전(流轉)이기에 나 또한 도(道) 아래 있는 존재라서 반드시 변하며 나의 마음도 역시 변할 것이기에 지금의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마음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바로 지금의 너를 향한 내 마음을 나도 너도 변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오롯이 기억하자는 속삭임.


어쩌면 젊은 객기 같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론 그게 세상의 진정한 이치가 아닌가 싶어 무릎을 치게 만든다.

사십의 딱 절반에 있는 나도 머리가 번쩍이게 되는 시이다.


가끔 무언가 신선한 게 필요할 때 '즐거운 편지'를 즐거운 마음으로 읽고 그 언젠가 앞에 나서지 못하며 뒤에서 안절부절못하지 못했던 첫사랑 그 님을 생각해 보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까? 또 그에게 눈은 몇 번을 내리고 그쳤을까?를 생각해 보는 즐거움도 솔솔 치 않을 거 같다.

이상 황동규 시인의 데뷔 작품 '즐거운 편지'였다.

시인 황동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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