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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Nov 04. 2022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고정희 시인은 1948년생으로 전라남도 해남 출신이며 본명은 고성애이다.

그보다 2살 위인 1946년 같은 해남 출신인 김남주 시인과 함께 올해 10월 '시인고정희길'과 '시인김남주길'이 명명되었다고 하는데 동년배의 해남 출신 사회참여적 문인을 기리는 사업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참 잘한 일이라고 여겨지며 한편으론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나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든다.


고정희 시인은 한국신학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75년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전남일보 기자와 광주 YWCA 대학생부 간사 그리고 크리스천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와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을 역임하고 '여성신문'의 초대 편집주간으로 일했다.


1970.80년대 여성운동과 광주민주화학생운동을 겪은 시인으로 사회참여적 시문학 창작에 몰두하여 10권의 시집을 간행하였으나 1991년 6월 그토록 사랑하던 지리산에서 등산 중 실족하여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늘은 이런 고정희 시인의 대표자 '상한 영혼을 위하여'를 감상해 보자.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휠휠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시집 '이 시대 아벨' 中 1983년 문학과지성사


시(詩)에서 가장 인상적인 표현을 들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답하겠다. 바로 1연 마지막행의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라고.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고통에 대하여 피하지도 주저하지 말고 그것들에게 충분히 흔들리며 가자.

지금껏 살아오며 그 수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보란 듯이 살아서 이렇게 아름다운 시 한 편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이 하늘 아래 나를 잡아주는 무수한 연대(連帶)가 있었으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그 고통만을 더 할 뿐이다.

고통의 구체적 실체를 알아야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본다면 고통을 팔 벌려 안아 품을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2연의 주요 내용)


그리고 3연에서는 고통을 대면할 수 있는 통과의례로 외롭기를 작정하라고 권한다.

고통의 실상을 잘 개 쪼개어 보려면 필히 외로워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어떠한가? 고통의 실상을 외면하려 여러 사람에게 묻히는 과오를 저지르고 만다. 고통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대중 속으로 자신을 파묻으며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망각을 위하여 얼마나 분주히 활동하였는가?

반대로 고통과 대면하기 위하여 내면과의 침잠을 통해 진솔한 대화를 해본 적이 있는가?

모두가 잠든 새벽 새까만 암흑 속에서 눈을 감고 나 자신에게 나는 누구이며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고통은 무엇이며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또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홀로 섬을 통해 고통과 마주하는 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는가?

마지막 연에서는 그런 고통과 마주하는 외로움에 대하여 두려움을 떨쳐줄 용기를 주고 끝을 맺는다.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라는 구절을 통해서이다.

홀로 설 외로움에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가 사는 하늘 아래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다고 하니 그 손은 무엇인가? 종교적 구원일 수도 있고, 철학적 차원의 자기 성찰을 통한 홀로 섬일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우정이나 가족애일 수 있다고 본다.

망각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어도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하여 단 1의 각성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고통 속에서 삶의 고통을 하나하나 슬라이스 내어 들여다본 후의 삶은 분명 다른 차원의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통찰의 밑거름이 바로 종교. 철학. 우정. 희생. 가족애. 사랑 등이 될 것이다.

그 구원은 그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면 될 것이다.

시를 다 읽은 불교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의 유명한 구절이 떠올라 적으며 마무리한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정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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