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시인은 1948년생으로 전라남도 해남 출신이며 본명은 고성애이다.
그보다 2살 위인 1946년 같은 해남 출신인 김남주 시인과 함께 올해 10월 '시인고정희길'과 '시인김남주길'이 명명되었다고 하는데 동년배의 해남 출신 사회참여적 문인을 기리는 사업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참 잘한 일이라고 여겨지며 한편으론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나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든다.
고정희 시인은 한국신학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75년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전남일보 기자와 광주 YWCA 대학생부 간사 그리고 크리스천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와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을 역임하고 '여성신문'의 초대 편집주간으로 일했다.
1970.80년대 여성운동과 광주민주화학생운동을 겪은 시인으로 사회참여적 시문학 창작에 몰두하여 10권의 시집을 간행하였으나 1991년 6월 그토록 사랑하던 지리산에서 등산 중 실족하여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늘은 이런 고정희 시인의 유고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를 감상해 보자.
-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고정희 유고 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中 창비 1992년
고정희 시인 문학의 기저 정신은 여성해방, 민주, 자유, 저항 그리고 기독교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한국신학대학교를 졸업했고 살면서 개종이라는 것을 안 했으므로 그녀는 기독교적 세계관 아래 고통받는 민중의 권리를 위하여 치열하고 또 처절하게 저항하고 부딪혔다.
1991년 6월 지리산에서 삶을 마감하기까지 그녀가 목도한 세상은 어떠했는가?
1980년 5월의 광주, 1987년의 1월의 그 사건과 6월의 뜨거움, 1960년대부터 근대화라는 미명으로 이어져 온 노동착취, 그리고 그 안에서 소외되어야 했던 여성.
특히, 그녀가 생을 마감하기 전 필리핀에서 경험한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는 또 다른 비참함이 있었다. 신자유주의 세계의 저 깊은 나락의 밑바닥에서 절대빈곤과 성(性) 착취로 얼룩진 삶들.
어쩌면 우리가 그녀의 그 고운 성품과 글 솜씨로 무엇이든 정의를 말하라고 더 거친 세상으로 더 거친 글로 내몬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또는 반성의 마음까지 든다.
어쨌든 시로 돌아와서 그녀의 시를 읽으면 분명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는데 왠지 불교적 세계관으로 이해하면 그녀의 글들이 더욱 가슴을 후벼파는 것은 도무지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하긴 니체의 말대로 종교라는 것이 죽음 이후 것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만들어졌다면 어쩌면 불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또 다른 많은 종교도 모두 그 정신은 같을 것이다.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 이후에 과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형이상적인 세계가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정말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물론 질량보존의 법칙으로 나를 이루었던 물질은 다른 무엇의 그 무엇이 되어 존재하겠지만 우리가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도대체 어찌 된다는 말인가?
그녀의 시(詩)를 읽고 있자니 그 인간 실존적 불안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도무지 알 수도 없고 그 누구도 결론 내지 못한 그 질문 말이다.
시를 막힘없이 쭉 읽고 있노라면 시각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을 것이다.
바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에서 주인공 역할을 한 박정민 배우가 바닷가가 보이는 어머니 무덤가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는 바로 그 장면. 아마도 이준익 감독이 이 시(詩)를 오마주 한 것 같다.
그 시각적 이미지 아래 시는 그 서정성을 배가 시키니 그저 그 오마주가 감사할 따름이다.
화자는 어머니의 무덤가에서 무언가 비어있는 여백을 느끼며 삶의 위안을 받고 있다.
생각해 보면 무덤이라는 것이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었다.
소위 풍수 좋은 곳에 묘를 써야 후손이 잘된다고 양지바르고 바람도 잘 통하고 풍광도 좋은 그런 땅에 묘를 썼다. 산사람이 죽은 이들에게 산사람의 위안을 위해 양보한 좋은 땅 무덤가.
그곳은 이른 바 명당으로 불리며 무언가를 훌훌 떨어버릴 수도 있는 곳이며 때로는 새로운 그 무엇을 잉태하는 삶이 순환하는 생기 넘치는 자리였던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이번 주말 일본의 풍수가가 대한 제국의 기(氣)를 막고자 만들었다는 금곡릉을 제외하고 어디든 조선왕릉을 찾아가 좋은 기운을 느껴보고 오자.(동구릉의 문종 묘도 풍수 전문가인 세조가 나쁜 자리로 만든 곳이니 참고하시라. 그곳에선 절대 좋은 기운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왜 그런 생각을 못 해보았는지 과연 무덤가는 음산한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자리가 아니라 산자의 풍요를 비는 풍요의 자리였던 것이다.
사라져가는 시신이 묻힌 자리 무덤. 하지만 그 쓸쓸함 뒤에는 여백이라는 가능성이 있는 곳이오. 그 가능성은 오로지 생명이니 마음 무거울 때 사랑했던 이의 무덤을 찾아 고요한 여백으로 위안 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가르쳐준 고정희 시인의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사실 내 기준에서는 윤회의 불교적 세계관을 통해 조금 더 그 말에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지만 삶의 긍정을 통한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도 큰 위안이 될 수 있는(왜냐하면 우리는 이 시를 통해 죽음이라는 무지의 공포를 긍정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아름다운 시 한 편 감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