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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Dec 02. 2022

장석남- 배를 매며, 배를 밀며, 마당에 배를 매다

생성- 소멸- 초월의 세계관을 연작시로

장석남 시인은 1965년 인천광역시 덕적도에서 태어났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80년대 앙가주망 문학사조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자유롭게 쉬운 언어로 이루어진 서정시를 쓰고 있으며,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 실존 한계의 인식과 초월이라는 문제에 대한 독특한 자신만의 시 세계를 만들어 나가아고 있다.

현재는 한양여자대학교에서 문예 창작을 가르치며 꾸준히 시집과 에세이를 출간하는 중견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오늘은 이러한 장석남 시인의 대표적인 연작시인 '배를 매며', '배를 밀며', '마당에 배를 매다'를 연달아 감상해 보자.


배를 매며

-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를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장석남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의 온 통증' 中 창비사 2001年



시인의 고향이 인천 덕적도 섬인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자신이 배를 매던 기억으로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항구에 들어온 배를 고정된 무언가에 단단히 묶어두지 않으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거나 좌초될 것이기에 배는 인력으로 끌어당겨 무언가에 단단히 묶어 놓아야 한다.

사랑도 그렇게 단단하게 묶이는 과정으로 시인은 묘사하고 있다.

내가 너에게 그리고 네가 나에게 표류하지 않도록 묶는 행위. 그 행위는 비단 서로를 얼 매이는 단순한 연대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 사랑의 묶임은 시공(時空)을 초월한 두 영혼의 결합으로 마지막 연의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라는 표현처럼 세상의 중심이 되어 밝게 빛나는 생의 가장 아름답고 단단한 결합임에 대하여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배를 밀며


-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장석남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의 온 통증' 中 창비사 2001年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던가?

만난 사람들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 있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인 게 우리 인간의 역사 이래 육신(肉身)을 빌려 만난 인연이 지금까지 영원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람들은 내가 알기로는 없다.

만나면 반드시 헤어져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이다.


시인은 그 공허함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물리적인 힘을 가해 바닷가로 내가 빠지지 않을 최대한 힘을 써서 밀어버린 배 그 신경 곤두서는 배밀이를 끝내고 나면 허공에서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손짓.

배는 바다로 밀려가고 바닷물 위를 가로지르는 흔적들 그리고 이내 사라지는......

모든 것이 없어졌지만 우리네 마음 안으로 그 아픔은 시나브로 파고든다.


이별의 아픔을 표현한 시(詩) 중 배를 미는 순간의 허무를 빗대 그 먹먹한 마음을 이리 잘 표현한 시가 있었던가?


마당에 배를 매다


- 장석남


마당에

녹음 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별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이 세상에 온 모든 생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곧 오리라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


장석남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의 온 통증' 中 창비사 2001年


연작시의 마지막에 다다랐다.

배를 매고 밀며 사랑의 고귀함과 허무함을 느끼다 상처받은 우리들의 영혼은 어찌 되었을까?


이제 시인은 그 배를 마당에다 묶는다.

그리고 바다가 아닌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을 기다린다.

하얀 눈발도 아닌 푸른 눈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인간 실존의 한계를 극복하는 초월을 상징하는 듯하다.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 사랑의 표면적 의미를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 생채기를 통해 상처받은 모든 영혼을 사랑할 줄 아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과 같은 인류애적 사랑일 것이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쓸쓸히 사라져가는 별과 같은 우리 모두의 영혼을 보듬을 수 있는 그 거룩한 사랑. 그것으로 우리는 삶의 고통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연작시는 세 시를 모두 읽어야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힘들지만 세 시를 한꺼번에 포스팅했다.

생성- 소멸- 초월의 세계관을 배를 매고 밀다 다시금 마당에 매어 놓고 푸른 눈발 속으로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이 시를 어찌 감흥으로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석남 시인의 배(船) 관한 연작시 세 개를 감상하며 큰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에 대하여 다시금 성찰해 본다.

장석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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