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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Jan 04. 2023

아니 에르노- 한 여자

한 사람의 삶은 우리 모두의 역사다.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니 읽어봐야겠다. 왜냐면 나는 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책을 늘 읽어왔으니깐. 몇 해 노벨문학상을 뜬금없이 밥 딜런이 받았을 때의 허망함이란.......

왜 허망하냐고? 그의 대표작은 그의 노랫말이기 때문에 사서 읽을 책이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노래를 연신 틀어놓고 가사를 음미하기에도. 음 패스~

올해 수상자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고 느낀점 이라고 할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도 이 감정은 모지? 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밥 딜런의 영어 가사를 음미하려 해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의 대표작 아니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번역 소개된 작품 '한 여자'를 읽고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맥(脈)을 못 잡는 심정이란 가수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때의 허망함과 다를 바 없는 감정인 듯하다.

젊은 시절의 아니 에르노

우선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가 밝힌 그녀의 선정 사유를 들어보자.



개인적인 기억의 뿌리와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기 있게, 임상적 예리함으로 탐구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와! 어렵다.

이 한마디 문구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무언가 어려운 이야기를 했던 과거의 사람들의 말들 아니 사상들을 끄집어 내야 할 것 같다.

개인적인 기억의 뿌리와 소외라 하면 우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떠오른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오이디푸스 단계의 아이의 억압된 성욕이 개개인의 무의식 속에서 자아를 이룬다고 했으니 '기억의 뿌리와 억압된 욕망'이라고 해야 하나 소외라는 말이 따라왔으니 인간의 자아는 개개인이 속한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받는다는 신프로이트적 경향을 나타낼 것이다.


여기에 집단적 억압이라고 하면 무언가 구조주의적 냄새가 난다. 개개인의 무의식과 의식의 기저에 다다르면 인간은 하나의 규합되어 규정되는 개개인들의 총체적인 구조를 공유한다.

이것을 임상적 예리함으로 탐구했다? 무언가 실증적이며 과학적 방법론으로 접근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를 가지고 개개인의 사건을 픽션이 아닌 팩트로써 분석하여 인간에 대한 이해의 장을 넓혔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한번 위의 말을 더 다림질해 보자면 이성적 사고보다는 감성적 접근을 통하여 개인의 삶에서 연역적으로 인간 전체에 대한 이해를 넓힌 문학적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물론 목가적일상추구 개인적인 생각이다)

자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난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작품 '한 여자'를 감상해 보자.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

책은 1986년 어머니가 죽자 아니 에르노가 아는 어머니의 삶을 그녀의 방식대로 되돌아본 이야기이다. 그녀는 책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 어머니의 열망대로 내가 자리를 옮겨 온 이곳, 말과 관념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스스로의 외로움과 부자연스러움을 덜 느끼자면, 지배당하는 계층에서 태어났고 그 계층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던 나의 어머니가 역사가 되어야 했다.


아니 아르노 '한 여자' 中



이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한 여자'를 모두 읽어나야 온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1906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이브토라는 곳에서 아니 에르노의 어머니가 태어났다.

우리는 아직 대한제국으로 고종이 황제로 있을 시기 당시 프랑스의 보통 가정집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녀의 외할머니는 초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여 초등학교 교사를 할 정도였다고 하며,(당시 프랑스도 중등. 고등교육은 아무나 받는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다) 어머니도 늘 주린 배를 채울 생각을 했으며 학교는 띄엄띄엄 초등학교를 겨우를 졸업하여 책을 읽을 수준의 교양만을 갖추었다고 한다.

1930년대 프랑스도 공업화된 자본주의국가가 되어 노동자계급이 탄생하기 시작하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계급이라고 할 수 있던 농노 출신 여자들이 하던 식모살이보단 자부심으로 모던한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고 한다.(당시 프랑스 중하류 계층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직업은 상점의 점원이었다고 책에 나온다)

그리고 어머니는 동배. 동류의 여자들과 다르게 몸가짐을 바르게 가졌으며 교양을 쌓기 위해 잡지를 구독했다. 그리하여 같은 계급의 8살 연상의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의 행복을 위해 하나만 낳아 잘 교육시켜 프티부르주아 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시켜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이는 병으로 죽고 2차대전 와중에 지금의 아니 에르노를 낳고 전쟁을 견뎌 냈다고 한다.

전쟁 후 잡화점을 열어 돈을 벌고 자신의 생각대로 노동자 계급의 자신의 딸을 프티부르주아 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시켜주기 위해 기숙 사립 고등학교에 보내고 대학교육을 시켰다.


그 와중에 시대와 계급과 교육이 달랐던 모녀는 다른 모녀와도 마찬가지로 갈등을 겪었다.

딸이 바람대로 부르주아 출신의 남편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교육자로의 삶을 사는 딸과 함께 살기를 원해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것은 어머니의 신분 상승 욕에 대한 만족도 있었다는 작가의 분석에 이것은 단순한 소설도 전기도 아닌 그녀의 말대로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었음을 다시금 느낀다.


이렇게 어머니는 늙고 직업도 없고 삶에 대한 활력 또한 소소한 것들에서 얻는 노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치매라는 병이 걸리고 기억을 잃어버린 그녀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살아 내고자 하는 본능에 기대어 살아가는 인간. 이것이 아니 에르노가 바라본 말년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이내 1986년 여든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등진 그녀의 어머니.

그 어머니를 보며 작가는 21세기 어느 날 그녀 또한 그렇게 치매환자가 되어 그저 삶에 대한 본능으로 세상에 투쟁하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으로 글을 마친다.

하지만 올해 80세가 된 그녀는 치매 노인 요양원이 아닌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문학상이라는 인류 최고의 가치를 거머지는 영광의 날을 보내고 있다.

현재의 아니 에르노

이제 '한 여자' 끝부분의 텍스트를 이해할 것 같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저 20세기 초 그러니깐 프랑스혁명이 모두 마무리되는 계몽주의 세상에 태어나 과거의 농노제가 아닌 막 싹트는 자본주의 사회 노동자 계급으로 본인은 오르지 못할 나무와도 같았던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열망으로 자식을 키워 결국 그 계급으로 승천(?)을 이루어낸 투쟁의 역사였던 것이다.


'한 여자'는 시대적 담론 안에서 변증법적 사유로 따져 본다면 반(反)의 입장에서 정(正)에 합(合) 하고자 한 개인의 역사에서 우리의 역사를 반추한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노동자. 여성. 무산계급에서 더 나아가고자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살아냈다기 보다 그 모든 정열을 투쟁에 바친 투사였던 것이다.


이제 그녀의 말과 한림원의 선정 사유가 와닿는다.

절대 픽션으로 인간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그녀.

그녀와 그녀의 가족의 일을 가지고 문학을 하기에 글 하나하나가 고통으로 다가올 때가 많지만 그래도 허구를 가지고 인간 정신을 논할 수 없다는 어찌 보면 장인 정신과도 같은 마음으로 무장한 그녀.

그녀의 집념에 경의를 표하며 짧지만 강렬한 투쟁을 담담히 기억하는 책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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