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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Apr 06. 2023

샤를 보들레르- 고독(파리의 우울 中)

SNS에 열광하는 당신에게 주의촉구를 드립니다.

1815년 6월 벨기에에서 워털루 전투가 나폴레옹의 패배로 끝을 맺고 프랑스는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까지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통칭되는 '벨에포크'를 맞이한다.

어지러웠던 프랑스 혁명의 폭풍이 지나가고 자본주의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특별한 전쟁이 없었던 100여 년간의 시절 철학. 문학. 과학은 이성주의의 열풍을 타고 폭주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정반합의 변증법적 사고가 지배적인 시대사조 안에서 지식인들은 그 이성에 반기를 들며 점차 개인의 감수성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프랑스 벨 에포크 말기에는 그러한 위대한 문인들이 왕성히 활동했다.(앙드레 지드, 랭보, 베를렌, 프루스트 등)


오늘은 그중에서도 그들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소산문시'집인 '파리의 우울'에 수록된 '고독'이라는 시를 소개할까 한다.


샤를 보들레르는 1821년에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 낭비벽으로 인하여 치산자 선정을 받고 그의 문학적 재능이 함축되었던 시집 '악의 꽃'은 문단과 대중의 환호는커녕 외설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몇 편(6편)의 시는 정부 검열에 의하여 도려내어지고 벌금형까지 선고받는 작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 봉착하다 생계를 위하여 강연을 다니는 등 말년에는 가난과 건강 악화로 고통받다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작가이다.


이 시(詩)는 그의 사후 2년인 1869년 발표된 유작에 수록된 작품으로 2023년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고독'의 진정한 의미와 필요성에 대하여 공감 가는 내용이기에 소개한다.

차분한 마음으로 감상해 보자.

출처: pixabay.com

고독


어느 박애주의 신문 기자가 고독은 인간에게 해롭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무신론자들이 흔히 그렇듯, 교회 '신부'들의 말을 인용한다.

'악마'는 기꺼이 따분한 곳을 넘나들고, 살인과 음란의 '정령'은 고독 속에서 놀라우리만치 타오른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이 고독이 위험한 것은 자신의 고독을 정열과 과 망상으로 채우는 한가하고 방황하는 영혼에 한하여 그럴 것이다.


강단이나 연단의 높은 곳에서 말하는 것을 최상의 기쁨으로 아는 수다쟁이가 만일 로빈슨의 섬에 있게 된다면, 무서운 미치광이가 될 위험이 매우 큰 것은 확실하다. 나는 이 신문 기자에게 크루소의 용기 있는 미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고독과 신비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말은 함부로 내뱉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의 수다스러운 조속 중에는 사형대 위에서 맘껏 연설을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도중에 상테르 장군의 북소리에 의해 때아니게 연설을 중단할 염려만 없다면, 이 극형도 달갑게 받아들일 그런 인물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광설의 토로 속에서 다른 자들이 고독과 명상에서 얻는 것과 똑같은 쾌락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경멸한다.

무엇보다 이 천박한 기자가 내 마음대로 즐기도록 나를 내버려 두기를 바란다. "도대체 당신은 즐거움을 남과 함께 나눌 필요를 느끼지 않는 거로군요?" 하고 그는 꼭 사도 같은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보아라, 이 교묘한 샘쟁이를! 흥을 깨뜨리는 이 흉악한 친구는 내가 제 즐거움 따위를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내 즐거움 속으로 슬쩍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다.


"혼자 있을 줄 모르는 이 큰 불행!" 라 브뤼예르는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했다. 틀림없이 자신을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두려워 대중 속에 자신을 잊으려고 달려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서 한 말이다.

"우리의 불행은 거의 모두가 자신의 방에 남아 있을 수 없는 데서 온다."라고 또 하나의 현인 파스칼은 말했다. 그는 이 말을 하며 명상의 독방 속에서 모든 미치광이들을 떠올렸으리라 생각한다. 현대의 가장 그럴듯한 표현으로 부른다면 우애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매음 속에서, 그리고 법석 속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저 모든 미치광이들을.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 中 23번째 詩



출처: pixabay.com

스스로를 '댄디'한 사람으로(그의 댄디는 부르주아적인 물질적 댄디가 아니라 정신적 우월주의라는 프랑스만의 댄디즘이라고 할 수 있다) 자칭했던 비극적 운명의 한 천재 작가의 울분이 느껴지는가?


여기서 한 가지 참고할 점이라고 한다면 '신문 기자'는 당시 자신과는 마음이 맞지 않는 우매한 대중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자신의 댄디적 성향이나 대중을 선동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군상들이 느끼는 쾌락을 동류의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그 선동에 대해서 만큼은 경멸로 격하해 버린다.

왜냐하면 고독을 즐기는 자들은 타인의 취향에 대하여 가타부타 말이 없지만 대중을 선동하여 쾌락을 얻는 자들은 그 선동안에 타인의 비방하는 더러운 취향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SNS가 발달한 시대 SNS나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선동적 행위로 쾌락(경제적 이익을 포함)을 얻는 자(불특정 다수의 엄청난 관심으로 경제적 이득까지 챙기는 인플루언서를 생각해 보면 근 200년이 되어가는 당시와 지금도 대중적 취향은 그리 고급 지지 못해 보인다.)들의 지나친 행동으로 많은 사회적 물의 일으킨 점을 상기해 보면 결코 오래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왜 샤를 보들레르가 지금까지 댄디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는지 바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바이다.

보들레르는 시의 마지막에서 파스칼의 이야기를 하며 시를 마무리 짓는다.

"우리의 불행은 거의 모두가 자신의 방에 남아 있을 수 없는 데서 온다." 이 인용을 통해 자신의 생각 또한 꾸임 없이 과감하게 표현한다. '현대의 가장 그럴듯한 표현으로 부른다면 우애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매음 속에서, 그리고 법석 속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저 모든 미치광이들을.'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게 한 번쯤 진지하게 묻고 답해야 할 것이다.

나의 마음에게 침잠하여 진정한 삶을 구도할 것인가? 나를 대중 속에 묻어버려 타인의 욕망을 위해 살 것인가? 보들레르적 삶을 통해 욕망에 사로잡힌 나를 진실한 나에게로 돌려놓기에 대하여 다시 한번 깊은 사색에 잠기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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