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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Aug 10. 2023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아르튀르 랭보

이 난해한 외침들을 어떻게 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16살부터 19살까지 약관도 안된 나이에 햇수로 4년 실제로는 3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시(詩)를 쓰고 절필한 시인이 있다.

그의 동성 애인이었던 폴 베를렌과의 그 떠들썩했던 일들 이후 베를렌의 말처럼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가 되어 여기저기를 떠돌다 아프리카라기보다는 아랍에 가까웠던 아덴에서 밀무역까지 했던 이 남자는 37살의 나이에 온몸에 종양이 번져 오른쪽 다리를 완전히 절단한 끝에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눈을 감는다.

병원 사무원은 그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했다고 한다.


무역업자, 이송 도중에


현재 랭보는 불멸의 시인으로 전인류에게 기억되고 있음에도 죽음의 순간 그는 그저 그런 무역업자, 아니 나쁘게 표현했으면 '밀수업자, 이송 도중에'라고 기록될 뻔했던 순간이었다.


살아생전 그의 시(詩)들이 파리의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했음에도 "그건 다 헛소리였고 거짓말이었다."라고 하며 정말 말 그대로 절필을 했던 시인.

왜 그렇게 살았아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시선(詩仙) 있다면 바로 이 아르튀르 랭보가 아닐까 한다. 오늘은 이런 랭보의 대표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랭보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그가 외친 말들의 뜻을 헤아려 보도록 하겠다.

폴 베를렌(左)와 아르튀르 랭보(右)


아르튀르 랭보는 1854년 10월 20일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현재는 프랑스의 영토임) 지대인 아르덴 주의 샤를빌(현재의 지명은 샤를빌메지에르)에서 군인인 아버지와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적부터 집에 없었기에 편모 가정이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어머니에게 엄격한 가정교육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랭보는 고등학교 시절 학교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반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6살에 드메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며 3년 정도의 시간 동안 시 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우선 1871년 랭보가 드메니에게 보냈다던 편지의 내용을 보며 아르튀르 랭보의 시철학에 대하여 알아보자.


나는 감히 견자이야 하며, 의식적으로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추리해낸 착란에 의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견자로 만듭니다.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시인은 그 자신을 추구합니다. 자신 속에 모든 독소를 걸러내어 오직 그 정수만을 간직하려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신앙과 초인적인 모든 그의 힘이 필요한 말할 수 없는 고역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가장 위대한 죄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범죄자, 가장 위대한 저주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의 박식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미지 세계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영혼을 단련해서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누구보다도 풍요해진 영혼을!



그는 미지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미쳐 날뛰며 자기 환각들에 관한 지식을 상실하고 말 때에 그는 반드시 그 환각들을 볼 것입니다. 그는 지극히 엄청나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사물들에 의한 약동 속에서 죽어도 좋습니다. 그때에는 가공할 만한 다른 작업자들이 올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쓰러진 바로 그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랭보의 견자론이다.

자신은 의식적으로 '견자'로서 고통으로 세상을 보고 그렇게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목도하고 그 누구도 도달해 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를 시로써 표현해 보겠다는 이 의미심장한 다짐.

동성애자요. 방랑자로 기인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랭보이지만 그의 시론만큼은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겠다는 멋진 포부였다.


그리고 그는 그 시점부터 세상과 자신의 타락과 환각과 광기를 경험하며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 시작된 시 창작을 막 대학교에 입학한 나이인 열아홉 무렵 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접는다.

그리고 훗날 파리의 젊은이들이 그의 시에 열광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건 다 헛소리였고 거짓말이었다.


랭보가 시 창작에 열의를 보였던 1871년의 파리는 우울 그 자체였다. 프랑스 파리 전경(출처: pixabay.com)

우선 랭보가 견자의 입장에서 시를 쓰겠다는 다짐의 편지를 쓴 후 그가 3년 남짓 한 시간 동안 경험한 세계를 들여다보자.


1832년 7월 혁명으로 탄생한 루이필리프의 입헌군주제는 비록 과거의 왕정제와는 다른 체제였지만 공화제를 원하는 세력들은 만족할 만한 성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불만이 터진 것이 1848년 2월이었다. 프랑스에서도 근대산업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며 점차 사회주의 사상이 꿈틀 되기 시작하였고 노동자의 노동권과 아울러 정치 참여 권리가 보장되는 투표권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때 혁명이 발발한다. 그리고 그 혁명은 사회주의 계열의 혁명이었다.

마르크스는 이때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며 사회주의자들과 거리를 두었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그의 사회과학적 접근이 인류사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첫 장면이기에 그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95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이 공화제 대통령 선거를 했다.

당연히 사회주의 계열의 대통령이 나올 것으로 여겼지만 무언가 불안했던 시골의 농민층에서 과거의 유럽 대륙을 호령하던 나폴레옹의 그 시절이 그리웠는지 나폴레옹의 동생에게 표를 던지게 되고 그는 그렇게 그의 형과 똑같이 대통령에서 나폴레옹 3세라 하며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1789년부터 1871년 파리 코뮌까지를 프랑스 혁명의 기간이라고 한정해서 본다면 공화제와 왕정복고가 탁구게임처럼 왔다 갔다 하지만 헤겔의 철학으로 역사 발전에 대입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진보로 가야 하지만 발전은 전혀 없는 기이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가운데 1870년 보불전쟁이 터지고 민중이 나서서 프랑스를 구하고자 했으나 나폴레옹 3세의 역량은 그의 형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비할 것이 못되었다.

그 유명한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에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현재의 우리로 따지자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고 자 일어났던 예비군과 민방위들의 의병 격인 국민방위군은 프랑스 정부군과 프로이센의 군대에 의하여 파리에 포위당하고 4개월간 수많은 아사자와 학살자를 낳는 비극 속에 항복하고 만다.

이때 국민방위 정부가 그 유명한 파리 코뮌이다.

스페인 내전 시절 정부군(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등)과 비슷한 구성원을 가진 것이 파리 코뮌이라 할 수 있겠다. 노동자계급 등 하층민을 위한 정부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 역사상 공산주의 정권의 첫 등장이었다. 그때의 파리 코뮌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면 인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그 정부는 기존의 기득권층인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기독교 기득권층에 의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프로이센의 도움으로 처참하게 박살 나고 만 것이다.(절대왕정국가 입장에선 시민혁명-부르주아- 혁명을 넘어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혁명이 아닌 죽음을 의미하기에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힘을 합쳤던 것이다. 참으로 웃긴 게 나폴레옹 3세는 평등선거를 통해 선출된 공화국의 대통령에서 자기 마음대로 왕정제 국가의 황제가 되었는데도 부르주아와 기독교 기득권층의 용인하에 그들이 지켜주어야 하는 정부가 되었던 것이다.)


이 일련의 역사 속에서 아르튀보 랭보가 성장했고 보불전쟁과 1871년의 파리 코민은 그가 예술적 창작욕이 가장 드높았을 시절 직접 목도한 세상이었다. 한마디로 미친 세상 속에 천재 작가가 던져진 것이다.

'피의 일주일'이라 기억되는 1871년 파리의 공방전

그리고 그 시절 그는 미친 연애를 하게 된다.

그가 견자(見者)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편지 속에서 사랑과 고통, 광증에서 세상의 비뜰어짐을 보고 단련되어 풍요로워진 영혼으로 미지의 세계를 시로써 열어젖히겠다는 당찬 포부를 말했을 때 이미 세상은 상상이상의 광증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미친 사랑을 통한 고통으로 세상을 보고 난 후 세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 진정한 견자가 되고자 했으므로 그는 필연적으로 미친 사랑을 했어야 했다.

그 상대는 동성의 신혼생활을 하고 있던 10살 연상의 작가 폴 베를렌이었다.

이미 그의 그런 사랑은 그가 말했던 바를 실행으로 옮긴 것뿐이었다.

진정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견자로서의 시인이 되고자 했던 랭보 그 미친 시절과 고통으로 물든 미친 사랑을 했으므로 그는 이제 필연적으로 시를 써야만 했다.

그리고 탄생한 시가 바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열 편의 시이다.


시인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순진했던 자신의 생각을 곧바로 인정한다.

그래도 자신의 경험전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술이 흐르는 축제였다.

하지만 무릎에 아름다움을 앉히고 나서야 그것이 쓰다는 것을 알고 바로 욕지거리를 했다고 고백한다.

어린 시절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그가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시를 쓰고자 세상 속으로 들어갔지만 세상 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욕이 나오는 부조리한 현실뿐이었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랭보가 파리 코뮌을 통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민족주의, 기독교를 혐오했으므로 그가 낭만주의 사조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는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를 통해 상징주의로 교조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낭만주의적 사조에서 시를 쓴 것이 아니고 상징주의적 관점에서 시를 썼기에 그의 시는 수많은 아날로지, 메타포, 알레고리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마냥 베를렌과의 동성애를 통한 실패한 연애담으로 치부할 수 없는 부분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이 시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상징주의적 표현이므로 단순한 광증에 사로잡힌 연애 시가 아닌 것이다.)


화자는 세상의 모든 악(惡)을 경험함으로써 그간 자신이 알아온 세상을 반(反)으로 살아간다.

살짝 후회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미 지나온 길을 떠올려봐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면서 선(善)보단 악(惡)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고상한 척해 볼 필요도 없으며 거기다 우리에게는 실존의 한계라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

악을 선으로 위장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군상들 속에서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고통으로 보고자 했던 랭보의 순수한 마음은 불과 3년 만에 모든 것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라 표현하고 그 시절과 철저한 절연으로 살았던 랭보의 삶을 생각해 보면 그가 이 몇 편의 시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하는 것은 명확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자신의 그 고귀한 다짐은 온데간데없고 성악적 본성을 가진 인간과 그들이 만든 세상에 대한 거대한 실망 그것뿐이었다는 것에 대한 처절한 인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생 정도 되는 나이에 지독한 세상사를 알게 된 랭보.

그 후 절필을 하고 밀수무역에 무기 밀매까지 한 걸 보건대 그가 순수한 작가적 열정으로 다가가려 했던 세상은 너무나 뒤틀려 도무지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아낼 수 없었던 타락한 세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자신마저 악(惡)에서 구하지 못하고 동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큰 포부를 그렇게 쉽게 접을 만큼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아수라판이 그가 경험한 세계였으리라 생각하니 아픈 마음이 큰 쓰나미처럼 몰려든다.


그저 실패한 연애시라기보다는 참신한 시인이고 싶었던 랭보의 포부와 그가 사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겪은 3년의 짧은 세상을 지옥에서 보냈다고 한마음을 이제야 어느 정도 이해하며 '지옥에서 보낸 한 철'시집을 펼쳐보며 그 시절 랭보라는 천재 작가의 삶 속에서 시집을 마음으로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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