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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Sep 08. 2023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박준 시인이 2012년 12월에 발표한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의 프롤로그인 시인의 말엔 이렇게 적혀있다.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 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산이 저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몇 번이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시인의 말


사실 시집의 이름도 아리송하지만 프롤로그의 단어도 언 듯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당신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어떤 시간에 어떤 공간에서 어떤 이름으로 어떤 삶을 살고 갔는지 명확하게 시인이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집 전체를 읽고 그 당신을 찾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시인의 말과 언 듯 와닿지 않는 시집 제목에서 우리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 시집과 동명의 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감상해 보자.

출처: pixabay.com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 박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中 2012년 문학동네



1983년 서울 출신 시인의 글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조로(早老) 한 듯한 느낌이 너무 강하다.

일단 작가의 말에 대하여 나름의 평을 해보자면 작가는 인간의 삶을 고단한 여정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시집 전편에 그러한 느낌이 널려 있다.

우리의 고단한 삶에 대한 노래 그 노래는 모두가 힘껏 부르는 아름다운 하모니이다.

비롯 고되고 외로운 삶일지언정 누군가의 마음 따뜻한 위로 한마디가 어떤 방식으로든 전달된다면 그것이 바로 개개인이 모여 우리라는 공동체로 살수 있게 하는 끈끈한 형이상학적인 전착제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시인은 나의 삶도 당신의 말 없는 위로 속에 노력하는 한음의 소리가 되어 다시금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는 생각에 글을 쓴 거 같다.


그 틀에서 그의 시들을 이해하려 하고자 하니 시집 전편에 흐르는 우리의 삶의 노래들이 그저 푸념이나 우울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려는 애틋한 위로가 되었다.


오늘 소개할 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역시 그 틀에서 이해가 된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의 자서전을 대필하며 생계를 잇고 있는 무명의 작가가 어떤 사람을 만들어나가며 돈을 벌고 끼니를 해결하니 그 일은 시의 제목이 충분히 되고도 남는 것이다.

자신과 타인 삶이 하나로 버무려지니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세.

그것을 관조적인 언어로 무덤덤하게 이제 갓 서른에 접어든 젊은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왜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했다는 평을 듣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수작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집에 있었던 전편의 시를 감상하다 인간 실존의 허무함을 노래한 시가 있어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박준 시인

연화석재

- 박준


저녁이면 벽제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


석재상에서 일하는 외국인 석공들은 오후 늦게 일어나

울음을 길게 내놓는 행렬들을 구경하다


밤이면

와불(臥佛)의 발을 만든다


아무도 기다려본 적이 없거나

아무도 기다리게 하지 않는 것처럼

깨끗한 돌의 발


나란히 놓인 것은

열반이고


어슷하게 놓인 것은

잠깐 잠이 들었다는 뜻이다


얼마 후면

돌의 발 앞에서


손을 모으는 사람도

먼저 죽은 이의 이름을 적는 사람도

촞불을 켜고 갱엿을 붙여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돌도 부처처럼

오래 살아갈 것이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中 2012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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