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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Oct 31. 2023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테네시 윌리엄스

유진 오닐과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로 불리고 있는 테네시 윌리엄스.

그는 1911년 남부의 미시시피주에서 본명 토머스 러니어 윌리엄스로 태어났다.

테네시라는 이름은 아이오와 대학교를 졸업한 뒤 1939년에 스스로 개명한 이름으로 그의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듯이 당시 남성적인 미국인의 상징 격인 이름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플리쳐상과 뉴욕 극비평가상을 다수에 걸쳐 수상하였으며 대표작으로는 오늘 살펴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유리 동물원'.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등이 있다.


1940~ 60년대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으나 점차 변해가는 세상에서 그의 극본이 식상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화려했던 시절에 비하면 하대라 할 수 있는 대접을 받다 1983년 어느 호텔 방에서 병 마개가 목에 걸려 질식사했다. 쓸쓸한 말로가 아닐 수 없었다.

테네시 윌리엄스(1911. 3. 26. ~1983. 2. 25.)

오늘 살펴본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1947년 발표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이다.

1947년부터 1949년 12월까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며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1951년 비비안 리와 말론 브랜도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아카데미 4개 부분을 석권한 그야말로 전설적인 작품이다.


이 희곡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제 활황 속에서 미국인의 삶은 점점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즈음의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시에는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이곳에서 대농장을 소유했던 일종의 몰락한 프랑스계 귀족 출신의 여인 스텔라와 폴란드 이민자 출신으로 자동차 판매업에 종사하는 육군 중사 출신의 상남자 스탠리가 비교적 평화롭게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텔라의 언니 블랑시가 예고 없이 찾아오게 되는데 그녀의 첫 대사가 역대급이다.


사람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천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루이지애나주의 프랑스 고딕풍의 저택(左)과 앤티크스러운 전차(右) (출처:pixabay.com)

실제로 뉴올리언스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묘지라는 전차 그리고 극락역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인해 생긴 건지 1940년대 이미 존재했던 것에 모티프를 받아 대사를 만든 것 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루이지애나의 저택을 일찍 떠났던 스텔라와 달리 그곳에서 줄곧 살다가 고등학교의 영어교사로 재직 중이던 블랑시는 성향이 많이 다르다.

아직도 자신을 귀족 출신이라 생각하는 블랑시와 달리 스텔라는 그저 평범한 미국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느끼고 있다. 당연히 자신을 고귀한 신분 출신으로 여기는 블랑시는 스탠리의 마초스러운 성격이 그저 예의 없는 미개한 원시부족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를 아는 스탠리도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 위인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얹혀사는 블랑시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호시탐탐 블랑시에게 앙갚음을 할 구실을 잡고 있다. 스텔라는 임신을 상태로 언니인 블랑시와 남편인 스탠리의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이다.

그렇게 지내던 중 어느 날 스탠리가 스텔라에게 손찌검을 하는 일이 생기게 되고 블랑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스탠리가 구석기시대 유인원과 같은 인간이라는 험담을 스텔라에게 하게 되는 것을 엿듣게 되는 스탠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블랑시가 뉴올리언스로 오기 전에 살던 로렐에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지 또 어떤 평을 들었던 사람인지 지인을 통해 알게 되는데 그것에 대해 다는 아니지만 넌지시 이야기하며 반협박을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한편 블랑시는 이러한 환경(뉴올리언스의 평범한 서민의 집-그것도 렌트한 집)에서 이처럼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남자와 살고 있는 스텔라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나 스텔라는 그저 스탠리의 정열적인 그 몸의 움직임에 만족해 그 어떤 것도 감내할 만큼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역시나 부부가 아무리 싸워도 밤의 궁합이 맞는다면 아침 밥상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맞는 말인가 보다)


한편 블랑시는 스탠리의 친구인 미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결혼까지 꿈꾸나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미치는 블랑시를 멀리하게 된다. 이는 스탠리가 친구인 미치에게 블랑시가 뉴올리언스에 오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일러주었기 때문인데 겉으로야 루이지애나주 몰락한 대지주 가문 출신의 고상한 영어교사이나 사실은 나이가 어린 남자와 결혼하고 그 후 남편이 자살한 후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며, 고등학교에서도 제자와 성관계를 가지다 투서되어 학교에서도 쫓겨나듯이 그만둔 상태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신적 충격에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병리적 상태인 것이었다.

이 사실 또한 스탠리가 스텔라가 입원을 한 어느 날 밤 블랑시에게 직접 이야기하며 그날 밤 스탠리는 블랑시를 성폭행하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후 블랑시의 정신착란상태는 더 심해졌으며 잘 알지도 못하는 부자 친구에게 전보를 띄우고 이내 그쪽에서 초대를 받았다며 즐거워한다. 더는 못 보겠다는 생각으로 스탠리는 블랑시를 정신병원으로 보내기로 스텔라와 의견 일치를 보고 그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블랑시는 정신병원으로 이송되며 극은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

테네시 윌리엄스

위의 줄거리를 보면 느꼈겠지만 블랑시가 말한 첫 대사가 무엇을 암시하는지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 죽음의 전차를 반드시 갈아타게 되는데, 그러고도 욕망은 인간의 영혼까지 영향을 미쳐 극락이라는 증명되지 않은 유토피아로 가게 된다는 말인데 한마디로 현실에서 실존하기보다는 욕망 속에서 기생하는 자기기만으로 왜곡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답에 이르게 된다.


사실 유진 오닐이나 테네시 윌리엄스 등의 당시 활약했던 극작가들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같은 작품은 자본주의적 사실주의라 할 만큼 경제적 호황기에 인간의 욕망이 타인 앞에서 얼마나 자기기만적인지 그리고 나 자신의 자기기만은 허용하되 타인의 자기기만적 상황은 낱낱이 파헤치고 마는 인간의 악(惡) 한 본성을 잘 표현했다고 할 것이다.

근 백 년이 지나서도 이들의 작품이 공감 가고 또 꾸준히 현대적 상황으로 각색되어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은 지금의 우리 시대도 그때와 다를 바 없는' 물질만능주의로 왜곡된 자본주의 세상'라는 생각에 이루자 한층 더 마음이 씁쓸해진다.

사실 세상이 좋아졌다면 당시의 사람들은 욕망에 휩싸여 자매간 가족간 친구간에 몰인정하게 살았구나 하는 공감을 하겠지만 지금도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는 현실에 당시 작가가 의도했던 극적 효과를 똑같이 느끼는구나 하는 생각이 더 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임에 틀림없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미국 내 경제 호황뿐만 아니라 인류의 헤게모니를 가져오는 팍스아메리카나의 시대 표준적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욕망에 찌들어 자기기만으로 물든 블랑시와 또 생물학적 욕망에 휩싸여 가족애도 져버린 스탠리와 스텔라 그리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기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스탠리와 스텔라의 주변 인물들을 보며 현재의 우리 모습에 대한 각성을 해보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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