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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Nov 24. 2023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1936년 노벨문학상과 네 번의 퓰리처상을 받고 유명 희극배우인 찰리 채플린의 장인으로도 유명한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 명성에 비하여 그의 삶은 비극에 가까웠고 사위 찰리 채플린은 그와 한 살 차이 동년배로 그의 딸 우나 오닐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그녀가 18세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을 올리는 등 많은 부침이 있었던 삶을 살았었다.

오늘은 이런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를 감상해 보자.

미국의 희곡을 예술의 경지로 올렸다는 평을 받고 있는 유진 글래드스톤 오닐 (1888년 10월 6일~ 1953년 11월 27일)

우선 이 희곡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작가 유진 오닐은 책의 서문에 아내 칼로타에게 이렇게 적고 있다.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이 극의 원고를 당신에게 바치오.'

그리고 이 희곡을 쓸 당시 유진 오닐에 대해 아내 칼로타는 이렇게 회고했다. '들어갈 때보다 십 년은 늙은 듯한 수척한 모습으로, 때로는 울어서 눈이 빨갛게 부은 채로 작업실에서 나오곤 했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바쳐 '밤으로의 긴 여로'를 마지막으로 작업했던 유진 오닐.

그리고 그는 왜 이 작품을 사후 25년이 지나 발표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또한 연극을 위한 극본임에도 연극 무대에는 올리지 말 것 또한 주문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이 책이 서두에도 이야기했듯이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삶을 거짓 없이 눈물과 피로 맞닥뜨리며 쓴 자전적 내용의 희곡이기 때문이다.


사실 책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이 유진 오닐의 가족사 중 직계존속과 형제의 이야기를 모두 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정도이다.(대본에서 어린 나이의 죽은 유진은 막내인 자신으로 이름이고, 막내로 등장하는 에드먼드가 실은 죽은 형의 이름이었다는 점만 빼고 말이다)

이렇게 힘든 이야기를 눈물과 피로 쓴 유진 오닐. 그리고 그는 이 희곡을 통해 후대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 책의 줄거리이자 유진 오닐의 아픈 가족사를 살펴보자.

1922년에 촬영된 유진 오닐과 그의 둘째 아내 애그네스 그리고 아들 쉐인


'1912년 8월 어느 아침, 제임스 타이론의 여름 별장의 거실'로 극은 시작한다.

아버지 제임스 타일론 그의 아내 메리 캐번 타일론, 그들의 맏아들 제임스 타이론 2세, 막내 에드먼드 타이론이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그들의 여름 별장은 안개가 자주 껴 배들이 무적(안개 시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한 경적)을 자주 울리는 그리 한적하지 못한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

극의 시작은 이렇게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가 무슨 미국의 연극 수준을 몇 단계 올렸냐고 의아해할 정도로 여느 가족의 아침과 같이 평범하게 시작되지만 가족 간의 대화에는 무언가 날이 선 느낌이 있어 책을 읽는 감성이 서늘해지기까지 한다.


이렇게 책의 중반까지는 다소 지루할 정도로 이야기의 전개는 없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대사는 어쨌든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말겠다는 의지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붙잡고 있다.

이내 타이론의 아내이자 두 아들의 어머니인 메리는 마약중독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가족의 세 남자는 모두 알코올 중독(큰 아들 제임스)이나 최소 의존증(아버지 타이론과 막내 에드먼드) 환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이야기는 빠르게 또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막내아들 에드먼드는 거기에 더해 폐렴을 확진 받아 최소 6개월에서 1년까지 요양을 요한다는 전문의의 확진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제 이야기는 팽팽했던 긴장감의 원인이자 서로를 경계하고 애증 하게 되었던 원인들이 하나둘씩 베일을 벗기 시작한다.

우선 아버지 제임스는 1850년대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을 피해 미국 동부로 이주했던 아일랜드인의 2세대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는 미국으로 온 지 1년 만에 향수병으로 그의 고향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당연히 타이론은 물론이오 어머니와 그의 형제. 자매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삶을 살게 된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새도 없이 공장에서 일을 하던 타이론은 우연히 연극배우의 꿈을 꾸게 되고 운 좋게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주인공이 되어 많은 돈을 벌게 되지만 그로 인해 꿈꾸었던 '셰익스피어의 작품'전문 배우의 꿈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채 방랑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 가장으로 인하여 당연히 그의 아내와 아들들은 방황하게 되는데, 우선 아내 메리는 유복한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하여 수녀나 피아니스트를 꿈꾸었으나 미남의 연극배우였던 타이론을 만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된다. 특히, 둘째 유진을 여의고 막내 에드먼드의 출산 후 우울증으로 고생하게 되는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함에도 아버지 타일론은 돈을 절약하고자 방랑생활을 하던 연극인들의 뜨내기 의사에게 진료를 보게 하고 그들은 메리에게 모르핀 성분의 약을 처방하여 그녀를 지독한 마약중독자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두 아들 역시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큰 아들은 작가의 꿈을 꾸다 일이 풀리지 않자 아버지에게 의지한 채 술과 매춘으로 살아가는 삼류 건달이 되었고, 형에 대한 동경으로 역시 작가를 꿈꾸었으나 선원과 노동자로 남미와 뉴욕의 어두운 거리를 누비다 이제는 폐렴까지 앓게 된 비운의 젊은이가 바로 막내 에드먼드이다.

1962년 미국에서 영화화되었던 유진 오닐의 희곡'밤으로의 긴 여로'의 포스터

이렇게 한 가족의 비극적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카타르시스를 주며 어떤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 네 사람의 가족이 불행한 원인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진 오닐은 그들 가족의 잘못된 방향성에 대하여 슬픔으로 대하며 눈물과 피로 자신들과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에 사후 부검 과정에서 작품을 집필할 당시 소뇌 퇴행증 질환으로 마비와 우울증에 시달렸음에도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기억을 더듬고 글을 섰던 것이었다.


그렇다며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하루하루 저물어가는 몸과 정신을 이끌고 고통스럽게 쓰며 우리에게 말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대사 한마디에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는 바로 현재예요. 안 그래요?

미래이기도 하고. 우리는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애써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인생은 그걸 용납하지 않죠.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中



그렇다. 이 대사는 이 작품의 최대의 골칫거리 마약중독자 메리가 한 말로 그야말로 한마디도 옳은 것이 없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도 오로지 선물 같은 현재만을 살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두가 과거에 연연하며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낭비하는 삶을 살고 있다.


비단 메리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두 아들 역시 어머니가 마약중독자 된 것에 대해 서로를 탓하며 그런 고착된 생각으로 자신의 삶 역시도 그렇게 타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며 알코올 중독에 무직자로 아버지는 늙어서 양로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불안에 가족의 행복을 위한 치료를 애써 외면하고, 자식들은 자식들 나름대로 그들 삶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나 불굴의 의지나 열정이 결여된 것에 대한 반성 없이 그저 아버지의 무관심과 인색함을 탓할 뿐이다.

물론 메리도 그렇게 남편과 자식 탓을 하며 마약중독자가 되고 외롭다는 사실에 대하여만 탄식할 뿐이다.


일단 문제의 발단은 아버지의 트라우마와 그로 인한 돈에 대한 집착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아버지가 현재 자신의 삶(그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 등)과 행복(가족에 대한 관심 등)에 대해 좀 더 헌신하고 미래의 불안에 대한 집착으로 욕망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면 타일론가(家)의 1912년 8월 어느 아침은 극 초반의 평범한 여느 가정과 같이 일상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며 그런 팽팽한 긴장감과 밤이면 저마다 약물과 술에 취해 서로를 할퀴는 비극은 최소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나머지 가족들도 누구의 아내 그리고 누구의 자식으로서 아버지가 나에게 조금 더 잘해주었으면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라는 인간 본질적 사고보다는 각자의 실존을 인식하고 좀 더 성숙한 자아로써 자신의 삶을 개척했을 때 그들도 술에 의존하며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여 현재를 망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진 오닐은 바로 이점에서 자신 가족의 비극을 고통스럽게 복기하며 누구든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자기 삶 바로보기의 지난한 과정을 권했던 것이라고 여겨진다.

누구든 자신의 삶에서 현재에 충실하려 한다면 그 고통스러운 자기성찰에서 오는 실존적 자립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말했던 그 껍질을 깨고 나오기가 그렇게 힘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누군가에 의해 고통에 덤불에 던져지게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많은 신화와 종교 그리고 철학적 분석을 통해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알고도 그 알을 깨지 못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과오를 병마와 싸우며 세상에 내놓은 유진 오닐 그 마음과 정신, 행동은 감히 거룩한 종교인의 자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포스팅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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