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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Nov 29. 2023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그리스 3대 비극 시인으로 꼽히고 있는 소포클레스.

그는 기원전 496년 또는 497년에 지금의 아테네 인근인 콜로로스에서 태어나 기원전 406년 또는 405년 나이는 90~92세 정도에 아테네에서 숨을 거둔 이로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 년 전 인물이다.

살아생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여 극. 송가. 비가. 잠언 등 123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작품은 단 7편뿐이다. 특히,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해서 전해지는 이른바 오이디푸스 3부작으로 유명하다.


오늘은 오이디푸스 3부작의 대표작으로 시간 구성상 가장 먼저이기에 우선적으로 읽어야 하는 '오이디푸스 왕'에 대하여 줄거리와 니체. 하이데거 등 근대도 아닌 현대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들이 왜 이 그리스비극에서 이성이 아닌 감성적 인간으로서의 삶의 의미를 찾았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의 정리 또한 함께 해보고자 한다.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와 이를 맞추는 오이디푸스

우선 대체적인 줄거리를 파악하기 전에 '오이디푸스 왕'에는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은 오이디푸스의 테바이 왕권 취득과정이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해서 오이디푸스가 테바이의 왕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풀고 가야 될 것 같다.


오이디푸스의 친 아버지이자 테바이의 왕이었던 라이오스는 전해오는 신화에 따르면 그리 좋은 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선 라이오스가 가장 두려워했던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죽이게 된다는 신탁은 받게 된 것은 두 가지로 전해진다.

하나는 라이오스의 아버지이자 테바이의 왕이었던 라브다코스가 일찍 죽자 테바이의 왕권은 아직 어렸던 그를 대신하여 가족들에 의해 섭정에 들어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위협은 느낀 라이오스는 펠롭스에게 의탁하게 되고 펠롭스는 그의 아들 크리시포스에게 사두마차를 모는 법을 가르치게 한다. 이미 제우스를 매료시킬 정도의 잘 생긴 청년이었던 크리시포스에게 반한 라이오스는 강제로 그를 강간하게 되고 이에 수치심을 느낀 크리시포스는 자살을 한다.

이에 격분한 그의 아버지 펠롭스는 라이오스에게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만약에 낳더라도 그 자식이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한편 한 이야기는 '오이디푸스 왕'과 잘 부합하는 신화로 반인류적이고 폭력적인 라이오스의 사랑과 성적 행위에 격분한 헤라가 그런 신탁을 내렸고 나중에는 스핑크스를 테바이로 보내 사람들에게 수수께끼(아침에는 다리가 4개, 점심에 2개, 저녁에 3개인 것은? 답은 인간)를 내어 맞추지 못하면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 테바이를 몹시 어려운 처지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에게 객사를 하고 왕권을 잡은 그의 처남 크레온은 이런 상황에서 스핑크스를 없애는 자에게 왕권을 주겠다는 공표를 하게 되고 바로 오이디푸스가 그 수수께끼를 풀며 테바이의 왕이 되어 이 비극이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미 이 비극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하나 파국을 향해 차곡차곡 진행된 희곡이나 교향곡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구스타프 모로의 걸작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 상징주의 화가답게 목숨을 걸고 수수께끼를 내고 푸는 이들 같지는 않다.

'오이디푸스 왕'은 위에서 이야기한 시점에서 많은 시간이 흘러 오이디푸스의 친어머니인 이오카스테 사이에 두아들과 두 딸을 낳고 테바이의 왕으로 살고 있던 중 나라에 역병이 돌아 어려움에 처하자 처남인 크레온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보내 신탁을 구하고자 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신탁의 결과는 오이디푸스 왕의 전왕인 라이오스를 죽인 자를 잡아 복수해야 테바이에 내려진 이 국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이다.

이에 오이디푸스는 왕으로서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라이오스를 죽인 살인자를 찾고자 한다.

오이디푸스 자신은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인 코린토스의 왕인 폴뤼보스와 왕비인 메로페의 아들로 라이오스에게 내려진 신탁과 똑같이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신탁에 대한 소문을 피해 그리스 반도를 떠돌던 중 우연히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의 왕이 되었기에 정말로 그 신탁을 풀고 테바이의 평온을 간절히 원했다.


사실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라이오스가 살해당했던 시기 그의 수행원이었던 이를 찾아 살해 당시의 정황을 듣고 자신이 스핑크스를 만나기 전 길가에서 서로 간에 좁은 길을 양보하지 못해 일어났던 살인사건이 라이오스 왕의 죽음 상황과 얼추 비슷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이어 눈먼 예언자를 통해 라이오스 왕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면 엄청난 불행을 겪을 것이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코린토스 왕의 자식이라는 확신에 일을 점점 더 파헤치제 된다. 결국 그가 애초에 코린토스 왕의 친아들이 아닌 자로 발이 꼬챙이에 꿰인 채로(오이디푸스의 희랍어가 발이 묶인 자라는 뜻이다) 버려져 있던 것을 왕의 목부에 발견되어 마침 아이가 없던 국왕 부부를 위해 바쳐진 사실을 알게 되고 그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네 남매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로부터 자신들이 신탁으로 인해 아이를 버렸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에 오이디푸스가 당시 버린 자신의 아들임을 안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그 아이를 버렸던 당시 라이오스 왕의 노예로부터 모든 정황상 그 아이가 바로 자기 자신 오이디푸스임을 알게 된다. 동시에 그는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이성을 잃고 오열하던 중 그녀의 머리핀으로 두 눈을 찌르는 형벌을 스스로에게 내리고 크레온에게 왕위를 양도하고 자신은 테바이 외곽의 아무 곳에서 딸들과 함께 외롭게 죽어가겠다는 유배형 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현재의 관점으로 보자면 과한 인위와 우연의 일치로 인한 약간의 억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감정을 극대로 끌어올리기 위한 이러한 플롯은 조금 거북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니체나 하이데거 같은 현대철학의 거두가 극찬을 하며 현대인이 가져야 할 내적 가치에서 이성보다 감성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가 되살려야 할 정신을 비로 이들 비극이라고 했던 것에 대해 과연 이 처절한 대본에선 무엇을 보았던 것인지에 대해 짧게나마 소견을 이야기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우선 니체와 하이데거가 비판한 것은 비단 신(神) 지배하는 중세에 대한 단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중세의 신(神)이든 근세의 이성(理性)이든 하나에 가치에 몰입하여 보편타당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왜곡된 정신에 대한 비판이었다. 신에 대한 맹목적 신앙으로 얼룩졌던 중세를 지나 인간의 이성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던 유토피아의 철로인 계몽정신도 결국 부르주아의 서민 착취와 관료제로 얼룩져 세계 1.2차 대전의 어이없는 현실 세계를 목도한 우리는 이제 보편타당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이 아닌 인간 개개인의 감성에 주목한 다양성의 세계에 또 따른 희망을 걸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러한 감성에 주목한 과거의 엘도라도를 찾다 보니 그리스 비극의 이야기가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이것이 무리가 아닌 것이 중세 시대 수도원을 배경으로 쓰인 일기가 원작인 움베르토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아도 인간의 감성을 억제하고 신에 대한 무조건적 신앙을 위해 로마 가톨릭에서 금서로 지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물론 시학 2편은 비극보단 희극이 주된 주제이다)으로 인해 수도원 도서관을 배경으로 일어났던 살인사건이 그 모티프였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리스 비극은 그간 우리 인류가 잃어버렸던 감성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절대적인 신이 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한 인간 오이디푸스의 비극에 포커스가 맞혀준 이 작품을 통해 영웅이나 순교자가 아닌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는 인간 오이디푸스의 인간적 허물이 주된 내용이기에 니체와 하이데거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그리스 비극에서 신인류의 정신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 오이디푸스의 폭력성(사소한 다툼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여러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출 것을 권하지만 자신의 아집으로 끝까지 그 비극적 사건을 낱낱이 파고드는 경솔함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 완고함에 우리는 안타까워하며 그로 인해 파멸하는 오이디푸스 통해 나와 타인의 불행하지 않는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적 관점에서 예술의 역할이고 사명인 것이다.

바로 이것을 위해 위대한 철학자들은 그리스 비극에서 그간 억제되어 왔던 인간의 올바른 감성에 대한  등대 빛을 발견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나름의 소견을 얻으며, 그리 어렵지도 분량이 많지도 않은 이 고전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감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느껴보는 것도 매우 유익한 독서라 권하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이야기를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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