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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Nov 05. 2020

나도 너도 아무것도 아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독백으로 시작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기억을 잃어버린 한 남자는 잃어버린 기억 속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기를 내심 바랐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삶이었던 그 기억 찾기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기로 했다.

사실 이 책은 파트릭 모디아노가 201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읽은 기억이 있는데 6년이 지난 지금 책의 주인공 기 롤랑처럼 이 책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기에 다시금 읽은 책이다.

당시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해 망각 속으로 이 소설을 던져버린 이유를 이번 독서로 확실히 깨달았다.

소설의 메타포는 물론이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플롯을 오롯이 이해하기 위해 주인공인 기 롤랑의 잃어버린 과거 이야기 전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에도 나는 1943년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서 유대인과 적대국 국민이 겪어야 했던 도피의 역사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시대적 상황의 이해 없이 그저 텍스트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 플롯과 메타포를 온전이 이해할 수 있을까?

천재가 아닌 이상에야 한글만 읽다 이게 모야하고 의미 없는 시간 낭비를 했다는 실망만 가득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 그때보단 조금 나아졌다는 스스로의 위안으로 다시금 읽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 대한 간단한 리뷰를 해보겠다.            

십여 년 전 갑자기 부분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 기 롤랑 그는 파리에서 위트의 보조 탐정으로 8년을 일했다. 위트의 은퇴로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기는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해 단서가 될만한 것들을  찾아 나선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단서가 되는 사진 몇 장과 증언으로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을 찾는데 성공한다. 잃어버렸던 기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삶에 대한 염세적 생각에 대한 확증을 더해주는 절차였을 뿐이었다.


이 책은 유대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아버지에게 바치는 소설이라고 작가가 밝힌 바 있다.

나치 정권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사실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또는 강제 노역 중에 죽었는지조차 모를 인류 역사의 가장 끔찍한 인종청소였다.

그런 시대에 힘든 삶을 살았던 그의 아버지에게 그 시절은 차라리 망각하고 싶은 악몽이었을 것이다.

그렇게도 아버지에게는 잊고 싶은 동시대의 기억을 잃은 기 롤랑을 불러내어 악몽 같은 기억을 찾는 여정을 통해 파드릭 모디아노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젊은 시절의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그가 33살에 발표한 작품이다.

인간은 태어나 그 어떤 존재로 존재하다, 죽음이라는 종말을 통해 결국 무(無) 돌아가는 숙명을 안고 살아간다. 기 롤랑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언했던 인간의 삶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만큼은 현재보다 조금 더 나은 그 무엇이기를 바랐다. 사진 속 단서를 통해 자신이 하워드 드 뤼즈라는 귀족 가문의 상속자이기를 원했으며, 남미의 영사관에 근무했다는 말에 총영사나 상무관 같은 고위직이기를 내심 바랬었다. 하지만 그는 그 무엇도 아닌 그저 유대인이기 때문에 나치 치하에서 헛되이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애인과 도피하다 사기를 당한 그렇게 없어져 버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 중 하나였다.


어떻게 보면 허무주의적 관점에서 쓴 글 같지만 그 속엔 전쟁의 참혹한 피해자의 아들로서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읽은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었다.

유대인인 나도 독일인인 너도 어차피 죽게 될 것이다. 나의 물리적 죽음과 함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죽음은 이내 나의 삶의 흔적조차도 깨끗하게 지워져 그 무엇도 아닌 것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완성하게 된다.

몇몇 유명한 사람은 후대로 그 삶이 전해져 인류의 기억 속의 불멸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한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오롯이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기억되어 전해질 수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영원불멸의 삶을 산 인간은 아직 아무도 없다. 그런 태생적 한계를 지닌 인간의 삶에 서로를 속이고 증오하다 죽이는 일들이 필요할까?

다 부질없는 짓이다. 결국 주인공 기 롤랑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았지만 인간 삶의 태생적 한계만을 더욱 뼈져리게 느낄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무런 의미 없는 갈름을 통해 서로를 적대시할 이유 없이 그저 상대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어울려 살다 갈 권리만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기 롤랑의 과거 페드로가 나치 박해를 피해 피신했던 프랑스 겨울 휴양도시 므제브

대부분의 서평은 그저 한 인간의 정체성에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할까?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나는 소설의 강렬한 인트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에 초점을 두고 잃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찾는 주인공을 통해 나도 너도 모두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공감만을 했을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소녀가 멀어져 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 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中


우리들의 삶은 정말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로 슬픔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런 슬픔에 잠겨 시간은 점점 황혼으로 치닫는다.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삶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스스로 슬픔을 자처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주인공 기 롤랑의 과거 기억 속 인물인 페드로와 그의 애인인 드니즈, 귀족인 친구 프레디, 그의 애인 게이, 그리고 영국인 기수 빌드메르가 파리에서 므제브로 도미니카 여권을 가지고 도망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소설은 그들이 유대인이오, 적대국 국민이오 이런 식의 설명이 없다.

그저 그 시절 그런 이력의 사람이면 나치에 잡혀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상황이었나 보다. 

그것이 당시 나치 치하의 유럽의 일반적인 풍경이었기에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는 듯이 그저 자연스럽게 그들은 불안해하며 도망 다닌다.

그런 것에 대한 단서는 소설 속에서 그들의 외모가 동양적이니 국적이 러시아니 영국이니 할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 소설을 100%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 같다.

소설 속에서 이들의 외모가 동양적이라고 하는 부분이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 동양은 중국, 한국, 일본 같은 극동지역이 아니라 수천 년부터 그들과 역사를 함께한 중동지역의 사람들의 외모를 가리킨다는 것이다.(유대인의 출신 지역을 현재의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성경의 존재하는 그 유대인보다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강대국 사이에서 서로의 종교로 개종을 강요받던 지금의 터키 북부지역 그러니깐 요즘 전쟁으로 한창 시끄러운 아제르바이잔이나 아르메니아의 유목 민족이 대대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하여 현재 유대인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제일 많다고 한다. 특히, 유대인은 단일 민족적 유대를 가진 민족이 아니라 유대교를 믿는 종교적 유대관계가 우선인 집단이라고 한다)

우리가 보기에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지만 얼마 전 읽은 폴란드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쿠의 '태고의 시간들'에서도 폴란드 시골 사람들이 보기에 독일인과 자신들은 구분하기 힘들지만 유대인이나 러시아 사람 같은 경우 완전히 외모가 다른 이방인 취급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당시 부유층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은 자신의 국적이나 출신을 숨기고 남미 위조 여권으로 나치 치하를 벗어나 미국 등으로 탈출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이 부분을 알지 못하고 책을 읽는다면 다소 지루하거나 이해하기 힘들 것이기에 미리 일러두는 바이다.


알고 읽으면 더 감동적인 소설 파드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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