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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Nov 24. 2020

인간의 원죄는 무엇이고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나?

에덴의 동쪽- 존 스타인벡

영국인들이 비틀스를 자랑하면 미국인들은 엘비스 프레슬리로 응수하고 또 그들이 셰익스피어를 자랑하면 미국인들은 존 스타인벡으로 응수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존 스타인벡은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꼽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존 스타인벡의 대표작은 '분노의 포도'와 '에덴의 동쪽'으로 꼽히는데 작가 본인은 살아생전 '에덴의 동쪽'이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은 작품이고 이전에 발표된 것들은 이 '에덴의 동쪽'을 쓰기 위한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이 '에덴에 동쪽'이라는 작품에 많은 애정과 자부심 등이 녹아 있다는 뜻인데 그것은 아마도 가장 미국적인 인물들로 하여금 가장 미국적으로 인류 최초의 기록인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인류의 원죄와 구원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만큼 미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표본을 만든 작가가 아닐까 싶다.

그럼 이제 그 가장 미국적인 이야기에 들어가 볼까 한다.             

가장 미국적인 작가 존 스타인벡

일단 우리는 '에덴의 동쪽'을 생각하면 칼 역할을 연기한 시대의 반항아 '제임스 딘'이 떠오를 것이다.

영화 '에덴의 동쪽'의 주인공이자 요절한 배우 제임스 딘 하지만 소설 '에덴의 동쪽'에서의 주인공은 개인적으로 그 칼의 아버지인 애덤 트래스크로 여겨진다.(실제 영화는 칼이 고등학생 때 만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나 소설은 그의 아버지가 유년시절인 때부터 시작된다. 소설의 마지막 35% 정도만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애덤 트래스크이며 플롯 전개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 같은 새무얼 해밀턴조차 애덤에게 삶의 의미라는 스무고개에서 한 여덟 고개 정도의 답에 힌트를 주는 키 마스터 정도로 생각된다. 그만큼 애덤 트래스크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삶이 '에덴의 동쪽'의 주 줄거리이다.

주인공인 애덤 트래스크는 의붓어머니와 슬하의 이복 남동생과 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된다.

힘이 센 동생과 비교되고 심지어 동생에게 폭행까지 당하며 아버지에게도 관심 밖에서 외롭게 성장한다.

아버지의 강요로 군인이 되어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살다 고향으로 돌아오고 그의 아버지는 거짓으로 전쟁영웅이 되어 많은 재산을 남기고 죽는다. 

애덤은 졸지에 부자가 되고 나중에는 동생의 몫까지 상속받게 된다.

캐시라는 여자를 동정심으로 돕다 쌍둥이 두 아들까지 얻어 새 인생을 살기 위해 캘리포니아 살리나스로 거처를 옮겨 에덴동산을 만들고 행복하기를 기원하나 아내 캐시가 자신에게 총을 쏘고 집을 나가 유곽의 창녀가 되어 이름을 케이트로 바꾸고 자신을 잘 대해주던 사장마저 독살하는 등 전형적인 악녀를 만나 죽을 고비까지 넘기게 된다. 아내가 집을 나간 후 실의 속에 빠져 쌍둥이 아들인 아론과 칼조차 보살피지 못했던 애덤은 중국인 하인 리와 이웃인 새무얼 해밀턴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엄마 없는 가정을 건사한다.

시간이 흘러 이내 아론과 칼은 고등학생이 되고 아론은 명석한 두뇌와 선(善) 한마음을 가진 이로 칼은 반항적이고 사람을 이용할 줄 아는 악(惡)을 지닌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아버지로부터 관심 밖에서 소외되어 자란 애덤도 그 아버지와 다른 것 없이 아론에게는 무한한 애정과 응원을 칼에게는 냉정과 무인정으로 대해 그를 더욱 방황에 길로 접어들게 만든다.

선의 이미지인 아론은 고등학교를 1년 월반하는 우수한 인재로 스탠퍼드 대학의 학생이 되고 칼은 경찰서에서도 예의 주시하는 문제아로 성장한다.

아버지에게 끝내 인정받지 못한 칼은 자신의 어머니가 착하고 가엽은 여자 었다는 아버지의 말과는 다르게 유곽의 창녀라는 사실을 알고 반항의 의미로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형에게 그 사실을 말한다.

그 날밤 어머니는 자살을 하고 형은 군에 입대하여 끝내 전사하고 만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몸 져 눕고 칼 자신은 엄청난 죄책감에 억눌린다.

그리고 용서를 비는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으니 이것이 이 소설 최고의 클라이맥스이니 따로 이야기해보겠다. 이상이 이 긴 소설의 줄거리이며 새무얼 해밀턴 가족의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아직도 반항적인 이미지의 대명사인 '에덴의 동쪽' 칼 역의 제임스 딘

이 이야기가 앞서 말한 가장 미국적인 등장인물들이 인류 보편의 원죄의식과 내면에서의 선과 악의 대립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이렇다.

당시 유럽계 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대부분이 유럽에서 살기 힘들어 목숨을 담보로 새로운 땅으로 온 자들이며 그 미천한 역사 속에서 인류 문명의 가장 오래된 논란인 위의 두 가지 이야기를 그들이 풀어냈다는데 대단한 자부심을 준 것이다.(당시 보잘것없던 보통의 미국인을 등장시켜 위대한 문학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선과 악의 대립은 비단 서구 문명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를 놓고 2,500년 전부터 대립하였던 것을 보면 인간 본성을 선한 존재로 볼 것이냐 악한 존재로 볼 것이냐에 대한 논쟁은 전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카인과 아벨의 창세기 이야기는 카인이 신(神)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거부당하고 가졌던 원죄의식과 그로 인해 행하여진 악(惡)으로 동생을 살인함으로써 비로소 신(神)에게 악인이라는 낙인을 찍혀 에덴의 동쪽으로 내쫓기게 된다.

그가 우리 인류의 조상이니 우리의 내면에 죄의식이 흐르는 후예들인 것은 자명한 사실 아니겠는가.

그 죄의식과 선과 악의 대립은 어떻게 발현되고 극복될 수 있는지의 문제에 대해 존 스타인벡은 '에덴의 동쪽'에서 미국적 사고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그 미국적 방식은 무엇인가?

존 스타인벡은 중국인 하인 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원죄의식= 대자연 속에서 본디 나약한 인간의 존재는 집단에서 버림받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런 버려짐과 그 이후 곧 찾아오게 되는 죽음 그런 불안감이 원죄의식으로 발현하였다. 그러므로 인간 특히 나약한 어린아이들에게 관심과 보살핌이 없다면 그 불안감이 원죄의식으로 발현하게 된다.

선과 악의 대립: 불안감에 원죄의식 발현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악한 존재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것이 카인의 말로 아니던가? 과연 나는 본디 악한 존재인가? 그렇다면 나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영혼이 되리라고.



이 문제에 대해 존 스타인벡은 또다시 중국인 하인 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리는 몹시 초췌해 보였다. 그는 침대 위쪽으로 가서 시트 자락으로 환자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감긴 눈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고마워요, 애덤. 정말 고마워요. 당신은 내 친구예요. 입술을 움직일 수 있겠어요? 입술을 움직여서 아들의 이름을 불러보세요." 

애덤은 지친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조금 벌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물어졌다가 다시 움직이려고 했다. 곧이어 그의 가슴이 불룩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의 입에서 거친 숨이 뿜어져 나왔다. 입술 사이로 한숨소리도 새어 나왔다. 한숨에 섞여 나온 속삭임은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팀셸........, "

이윽고 눈이 감기면서 그는 영원히 잠들었다.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 中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팀셸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만 알면 된다.

사실 이것만 안다면 존 스타인벡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다 알게 되므로 이 두꺼운 두 권의 책을 그냥 얻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팀셸은 구약성서 창세기 4장 6절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니깐 카인이 자신의 재물을 반기지 않는 하느님에게 불만을 표시하자 하느님이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 중에 팀셸이라는 단어의 번역을 두고 문장 자체의 해석이 틀려지는데 영국의 제임스 왕 성서에는 이를 "너는 죄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미국 표준 성서는 "너는 죄를 다스려라"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팀셸의 의미는 '할 수도 있을 것이다'로 이렇게 되면 그 부분의 참뜻은 "다스릴 수도, 다스리지 못할 수도 있다"라는 것으로 인간이 선과 악의 사이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악을 다스리고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리하자면 본디 악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낙인찍은 칼에게 아버지는 리가 했던 말을 죽음 전에 온 힘을 다하여 이야기하며 18살 아들에게 앞으로 스스로 죄를 다스려 선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며 용서를 대신한 것이다.

이것은 존 스타인벡이 우리 인류에게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본성은 본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되므로 그 자유 속에서 선을 행하는 마음의 실천인 사랑을 행하라는 이야기이다.

결국 인간의 구원은 사랑의 실천인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위대한 예술작품을 읽고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존 스타인벡이 생전 사랑한 살리나스의 푸른 들판과 몬테레이의 바닷가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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