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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링 Apr 25. 2021

그녀는 안 예뻤다

뒤태미녀와 마스크 여신에게 찾아온 해피엔딩

 아빠를 쏙 빼닮은 딸은 잘 산다는 속설이 있다. 잘 사는 건 각자 다르겠지만, 유전자는 확실한 사실이더라. 나는 아빠의 이목구비를 도장으로 찍어놓은 아빠 판박이 딸이다. 탤런트 박상원을 닮아 훤칠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우리 아빠. 차라리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희미한 이목구비가 큰 키와 슬림한 몸매로 커버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내 눈은 단추 구멍처럼 작고 콧대는 어쩌다 날아온 축구공에 눌린 것처럼 납작하다. 다듬어지지 않는 광대뼈를 따라 볼륨감 없이 축 늘어진 양쪽 볼은 튀어나온 턱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조선시대 아니 신라시대쯤 태어났으면 나라를 쥐고 흔들었을지도 모르는 옛 시대의 미인상.


 아빠와 할머니는 자신들을 빼닮은 내가 자랑스러웠는지 혹은 죄책감이었는지, 우리 딸 예쁘다 우리 손녀는 복코에 복귀를 가졌다 해주었지만 세상은 가혹했다. 공공연한 왕따로 만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깨 넘어 내 외모에 대한 우스갯소리가 들려오는 날이 잦았다. 진짜 못생긴 애한테 대놓고 못생겼다고 하기 눈치 보였는지 다들 최소한의 양심을 지켜주길래 그래도 내가 그 정도는 아닌가 보다, 사실 안심이었다. 그런데 학원 강사를 하던 친척 언니의 귀로 학교에서 다들 나를 못생겼다고 하더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아빠는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벌컥 화를 내며 나를 지켜주었지만 그날 이후로 내 정체성은 못생겼음이라는 말에 잠식당하고 말았다.


 못생긴 여자에서 안 예쁜 여자가 된 것은 대학생이 되어 150만 원짜리 쌍꺼풀을 만들고 나서였다.


 검은 줄을 찍찍 그어 수박이 되고 싶었던 나는 하늘로 솟을 만큼 날카로운 아이라인을 그렸고, 개미허리를 강조하는 옷을 입어 예쁜 여자 코스프레를 했다. 여전히 코는 낮았어서 외모 콤플렉스가 껌처럼 들러붙어 있었는데 주변에 고민을 털어놓으면 수술하는  어떻겠는지를 낮은 목소리로 시선을 피하며 아주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부모님코수술에 반대이유는 다름 아닌 비용과 수술 부작용 그리고 달라질 인상에 대한 우려때문이었다. 코가 낮아도 아름다운 삶을   있다는 얘기는  누구도 해주지 않았다. 결국 무서워서 손대지 못했지만 코수술을 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를 세상에 대한 동경은 변함없었다.


 친구를 사귈 때도 외모를 먼저 봤다. 나는 안 예쁘니까 혹여 못생긴 친구를 사귀게 되면 끼리끼리라는 말을 들으며 등급이 떨어질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예쁜 친구들의 외모를 빛나게 하는 조연의 역할을 떠맡아야 했지만 차라리 그쪽이 마음 편했다. 어쨌든 난 그렇게 못생기지도 않았고, 예쁘고 세련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만큼, 나는 결코 찌질하지 않다는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


 조연의 슬픔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아왔다. 번호를 따이는 친구들, 잘생긴 남자에게 쫄 일 없이 갑이 되어 연애하는 친구들. 친구와 명동으로 쇼핑을 간 날 점원은 친구에게는 친절히 예쁘다 해주었는데 옆에 있는 날 보더니 씨익 웃으며 넌 공부를 열심히 하란다. 무조건 열심히 해야만 하겠다고. 무슨 의미인지 상세한 설명은 없었으니 뒷말은 내 상상력에 달려있었다. 아무리 추론을 해도 나는 못생겼으니 공부라도 잘해서 능력이나 키우란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안 예쁜 여자는 연애도 고달팠다. 친구를 사귀는 일과 마찬가지로 키가 작거나 찌질해 보이는 외모의 남자와는  한 번 이상 만날 수 없었고, 착하고 멀끔한 보통쯤 되는 사람도 어딘가 성에 차지를 않았다. 그 수준이 내 수준이라고?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고집은 해가 바뀔수록 세졌다. 겨우 매칭 되어 커플놀이를 시작했을 때에도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네가 예뻐서 만난다는 말을 죽어도 듣고 싶었고 혹여 관계가 어긋날 때에는 역시 난 예쁘지 않아서 그렇다는 절망감에 엉엉 울기도 했다. 내가 예뻤다면 그는 날 더 사랑했겠지라는 생각은 굳은 시멘트만큼이나 깨어질 틈이 없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 어려웠다. 예쁘지 않으니까. 그 누구도 나를 공주처럼 대해준 적 없었으니 나는 일관된 하녀의 태도를 유지했다. 차라리 받아들이면 편했을 텐데 머리로는 언제까지나 공주가 되고 싶었다. 대단한 연예인, 인플루언서는 고사하고 그냥 예쁘장한 애라도 되기를 바랐다. 나도 사회에서 상냥함을 서비스로 받아보고, 누군가에게 강력한 끌림이 되어 기꺼이 번호를 내어줘보고 싶었다. 친구 이야기를 듣고 그게 뭔 지 몸소 체험해 공감할 수 있는 딱 그 정도만이라도.


 그래서 마침내 번호를 따였을 때 행복했다. 길거리를 걷는 데 주변 남자들의 시선이 느껴져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점원에게 상냥한 대접도 받을 수 있었다. 마트에 가면 늘씬하고 예쁘다는 말을, 옷을 사러 들른 곳에서는 뭘 입으셔도 좋겠다는 말을. 카페에서 메뉴를 보고 있는데 굳이 다가와서 필요한 게 있냐고 묻는 점원의 친절에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 같았다.


 살을 뺀 것도 아니고 콧대를 높인 것도 아니다. 마스크를 쓰고 나니 일어난 일이다. 고등학생 때 한 친구는 내가 뒤태미녀라며 저기요, 어깨를 치면 네가 돌아보라고 그러면 내가 놀란 척 연기를 하겠다고 제안했다. 마스크까지 쓰고 있으니 이제는 금상첨화가 아닌가. 코로나는 나를 뒤태미녀에서 마스크 여신으로 거듭나게 했다.


  진짜 미녀가 된 것도 아닌데 마스크 하나는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30살인 내게 24살짜리 어린애가 번호를 물어본 일도, 뒤에서 쫒아와 내 얼굴을 확인하려 어설프게 왔다 갔다 하는 남자가 우스운 것도 모두 내게 새로웠다. 드디어 나의 시대가 왔구나, 친구들에게 큰 소리를 떵떵 치기도 했다.


  창피한 일인 줄도 모르고 나는 그렇게 즐거워했다.


  번호를 받아간 24살 아가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았고, 구석진 곳에서 얼쩡거리던 남자는 마스크 벗은 나의 본모습을 보고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렸다. 나는 코로나에 걸리기 싫어 마스크를 쓴 것뿐인데 이제는 낯선 이 가 느꼈을 실망감에 관한 반성문까지 써야 할 판이었다.


 반쪽짜리 미녀로 잠시 살아보니 내가 왜 그리도 예뻐지고 싶었는지 더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 기분은 뭘까. 완벽한 미녀가 되면 온전히 행복해질까.



 주일 오전 성경공부 시간이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신 후 마귀에게 세 차례의 시험을 받는 장면이었다. 목사님께서는 사람이라면 99.99%로 넘어지게 될 기본적인 3가지 시험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주셨다. 머리를 댕 하고 쳐 버린 건 마지막 관문이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_마태복음‬ ‭4:8-10‬ ‭


 마귀는 나에게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지름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신이 될 수 있는 것들로 유혹해 나를 넘어뜨린다고 하셨다. 만일 람보르기니가 눈 앞에 등장하면 우리의 반응은 어떻겠는가. 과연 누가 저 고급진 차를 소유했는지 조용한 침묵 속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될 거고,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차주인은 모든 이의 추앙을 받게 될 거란다. 그렇게 나는 신이 될 수 있다고, 우린 모두 본능적으로 사람들의 시선 받기를 욕망한다고.


 그제야 내가 왜 예뻐지고 싶은지를 깨달았다. 예쁜 여자로 멋진 남자를 만나 모두가 부러워하는, 단순 결혼만을 위함은 아니었다. 나는 신이 되고 싶었던 거다. 모두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친절한 서비스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아름답고 특별한 공주. 나의 존재가 한없이 무가치하게 느껴진 건 그러한 욕망이 실현될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지난 30년간 나를 괴롭힌 예뻐야 한다는 강박에 자그마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예배와 모임이 끝나고 공원을 산책했다. 거리의 반투명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은 변함없이 대충 반 정도는 아름다운 것 같다. 하지만 더는 누군가의 눈길을 찾아 곁눈질하지는 않는다. 나의 삶의 어여쁜 공주님은 오늘 이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한 분만을 나의 유일한 신으로 삼길 원한다. 외모로 세상의 영광을 누리는 신이 되어 숭배받는 삶과는 쎄굿바, 작별을 고하고 말이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가짜 정체성과 더러운 욕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신실하신 하나님이 지금 나의 과정을 책임지시고 앞으로의 거듭남까지도 계획하심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오늘.


나는 안 예쁜 서른 살의 평범한 여성이다.

그 사실이 이제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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