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의 덫에서 헤어 나오는 법
의문문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설명 의문문, 수사적 의문문, 명령적 의문문 그리고 감탄적 의문문 등등 꽤 많더라. 질문이라고 다 같은 질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쁘지? 맛있지? 너무 좋지? 괜찮지?
내가 주로 아빠에게 물었던 감탄적 의문문이다. 얼마나 예쁜지, 어쩜 이리 맛있는지. 어떻게 이만큼이나 좋을 수 있는지,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게 아닌지 감탄하는 표현들.
하지만 아빠는 명령적 의문문으로 받아들였다. 상대의 의견을 묻지 않고 무조건 그렇다 고만 대답해야 하는 걸 불편해했다. 아빤 내게 그렇게 묻지 말고 어떠냐 고 물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미 답이 정해져 있으니 자신이 답할 것이 없다면서.
그것으로도 한동안 속이 상했지만 어쩌면 내가 아빠의 의사를 존중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답이 뻔히 정해진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할 바를 다하고 나머지는 아빠에게 맡기기로 하니 굳이 좋은지, 어떤지를 묻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나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아빠가 아닌 연인에게.
동네 놀이터에 앉아 두세 시간을 훌쩍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갔다는 게 신기했고 좋았다. 그래서 재밌죠? 재밌다 그렇죠? 를 연달아 두세 번을 남발했다. 한껏 상기된 볼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는 왜 그런 당연한 걸 묻지 라는 표정으로 재밌으니까 시간이 빨리 갔죠 했다.
그의 당연스러운 거북함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나만 재밌었나. 나 혼자 헬렐레거린 건가. 왜 그런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해서 사람을 당황스럽게 했을까. 그런 말은 하지 말걸. 왜 그랬을까 대체.
나를 향하던 화살은 돌고 돌아 아빠에게로 향했다.
다 아빠 때문이야. 연애를 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불안함과 애정결핍은 아무래도 아빠와의 관계에서 불거지는 듯했다. 아빠가 내게 다정하게 해 주었으면 아무나에게 넙죽넙죽 헬렐레하지 않았을 거야. 고작 책상 하나 옮겨주는 직장동료를 보고 든 생각이다. 고마운 일이 맞지만, 그 작은 다정함이 내게는 굉장히 커 보였다. 나는 그런 선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기꺼이 날 위해 뭔가를 대신해준다는 감격적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했다.
마음이 아팠다. 아빠 같은 남자는 절대 만나지 말아야지 했건만 매번 마음을 홀라당 뺏기는 남자는 다 아빠 같은 남자라는 게 참담했다. 아빠에게 부족하게 받은 사랑을 모자람 없이 채워줄 다정한 이를 만나고 싶었는데, 결국 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구나. 불안정한 가정에서 태어나면 위험한 사랑만을 쫒으며 안정감을 느낀다는 말이 내게 적용되는구나 싶어 절망스러웠다.
퇴근하고 털썩 주저앉아 기도했다.
하나님 저 정말 속상해요. 저는 왜 그런 질문들로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거예요. 아니 근데 하나님. 그런 질문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아빠가 저한테 그런 거, 제가 속상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아빠 나한테 소리 지르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나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실수는 할 수 있어도 그게 당연한 건 아니잖아요. 그때 어린 저는 정말 힘들었어요. 그때의 나는 마음이 정말 아팠어요. 인정해주세요 하나님. 제 감정을 인정해주신 분은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저를 인정할래요. 아빠는 필요 없어요. 다른 사람의 인정은 필요 없어요.
모든 독을 하나님 앞에 울면서 쏟아냈다. 하나님께 어린 날의 상처를 내보이며, 아빠가 무서워 아무 말도 못 하고 벌벌 떨며 울음을 삼켰던 어린 나를 안아주고 아빠는 부정했던 내가 느낀 모든 감정을 내가 직접 어르고 달래 안아주었다.
그렇게 느낄 수 있어.
그건 속상한 게 당연한 거야.
그동안 정말 많이 속상했지.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빠를 귀찮게 하려고 쓸 데 없는 질문을 쏟아낸 게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아빠에게 인정받기를 원했고, 아빠의 충분한 사랑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질문은 상대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니 내 질문은 단순 감탄적 의문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나를 인정해달라는 강한 욕구가 묻어있었으니 아빠 입장에서는 어쩌면 명령이라고 느낄 만도 했다.
이제는 하나님이 인정해주시고
내가 스스로 인정하면 돼.
내가 재밌으면 재밌는 거야.
내가 좋으면 좋은 거야.
그 결론을 가지고 그를 만났다. 연락하는 게 불편하고 힘들었는데 문제가 해결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를 대할 수 있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리고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그때의 나의 질문에는 이런 의도가 담겨있었고, 당신의 대답은 내게 이런 의미로 다가왔다고. 화를 내려는 게 아니라, 당신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나는 이러한 일이 있어 그렇게 느낄 수 밖에는 없었으니 그저 알려주는 거라고.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걸.
그는 속상했겠다며 이야기해주어 고맙다고, 리액션이 중요한 사람이구나 하며 내게 필요한 사랑법을 대번에 알아주었다.
그리고 그 밤에 다시 하나님과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에게 털어놓은 덕분에 아픈 상처를 발견하고 잘 다룰 수 있었다고, 감사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는 예민하기만 한 못난이 같은데 하나님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해주시는 게 맞는지를 물었다. 하나님은 아닌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를. 그리고 하나님은 내게 잔잔한 말씀 한 구절로 다가오셨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_시편 2:7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정확한 말씀이 떠오른 건 물론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다정스레 내가 너를 낳았는데? 너는 내 딸인데? 하셨다.
그날 낮에 인터넷에서 본 글이 하나 있었다. 책 “예민한 아이 육아법은 따로 있다”를 홍보하는 글이었는데 예민하고 불안이 많은 아이에게는 아주 섬세한 육아법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는 모를지 몰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모르실 리 없었다. 내가 어떤 아이인지, 이런 예민한 아이에게는 어떤 육아법이 필요한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절대 모를 일 없고 못하실 일 없었다.
그것이 나에게 위로였고 든든한 힘이었다.
어느샌가 있는 줄도 몰랐던 상처가 나를 찌르고 남을 찔러 울고불고 툴툴대겠지만, 그때마다 나를 최고의 육아법으로 돌보시고 다루실 내 아버지.
내 아버지만 아시면 된다.
그가 나를 인정해주시고 사랑해주시니
타인의 동의와 애정이 없어도 나는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할 수 있다.
나는 서서히 질문을 줄여가겠지만
누군가 내게 수많은 질문으로 다가온다면
나는 기꺼이 그 마음을 들여다보겠다.
어린 날의 나를 보듬듯이,
나를 사랑하듯 너를 사랑해주겠다.
하나님이 내 상처를 보여주시고 고쳐주신 데에는
이웃을 향한 분명한 사명이 뒤따라올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