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돌아다니던 거지 소녀가 어느 날 왕의 자녀로 부름 받았다. 오늘부터 너는 나의 딸이야. 나의 사랑스러운 공주란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왕궁의 시녀들은 소녀를 데려다 따뜻한 목욕물에 더러운 몸을 깨끗이 구석구석 씻겨주고, 새하얀 잠옷을 입혀주며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의 다양한 음식을 눈앞에 가져다준다. 허기진 소녀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음식을 입안으로 욱여넣고 눈은 그다음 맛볼 음식을 향한다. 손톱 사이로 소스가 스며들고 입 주변에는 빵 부스러기가 벚꽃 피어나듯 묻어있다. 순백의 잠옷은 어느새 먹다 흘린 음식들로 얼룩덜룩하다. 배 부른 소녀는 칫솔을 엉성하게 쥔 채 위아래로 열심히 양치질을 하고 다시 옷을 갈아입어 잠자리에 든다. 딱딱하고 차갑기만 하던 길바닥에서 따뜻하고 폭신한 베딩이 깔린 넓디 너른 퀸 사이즈의 침대라니. 이게 혹시 꿈은 아닌가 볼을 꼬집고 두 발을 탕탕 침대 위에 굴러본다. 3,2,1. 꼭 감은 눈을 슬며시 떠 봤지만 여전히 침대 안에 누워있는 소녀는 정말 이상하다 읊조리며 스르륵 잠이 든다.
이튿날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에 부스스 눈을 뜬 소녀는 잠결에 머리를 긁적인다. 툭 내려놓은 팔에 뭔가 닿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보니 샛노랑의 손바닥 만 한 작은 편지지가 바스락 대고 있다.
사랑하는 내 딸아.
오늘도 멋진 하루를 즐기렴.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이게 대체 뭐지. 이 사람은 누군데 나를 자꾸 사랑한다고 하는 걸까. 나 같은 걸 대체 왜 딸이라고 불러서 잘해주는 거지. 소녀는 불편하다. 좋은 사람인 건 알겠지만 뭔가 착오가 있는 건 아닐까. 아이고 저희가 실수했습니다! 이 분은 당신이 원하는 딸이 아니었어요! 당장이라도 누군가 소리치며 달려올 것 만 같다. 하지만 머리맡에 두어진 편지도, 때마침 시중을 들러 나와준 시녀들도 모두 평화롭고 안정적이기만 하다. 완벽하게 짜인 스케줄대로 순항하는 한 척의 배가 생각날 정도로. 소녀는 길바닥에서 먹을 걸 찾아 뒷골목의 쓰레기통을 뒤지던 날들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게만 느껴지는 왕궁 생활을 즐기기로 했다. 내가 공주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언제 날 내쫓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을래. 나를 딸이라 불러주고 사랑한다고 하는 분 곁에 있다가, 나가라고 하면 그때 내 발로 나가는 거야! 밥값이나 숙소 값을 낼 형편은 안되니까, 혹시라도 그동안 신세 진 걸 갚으라고 하면.. 여기서 일을 해서 보수를 댄다고 하면 되겠지? 소녀는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에 대비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대안을 섬광이 번뜩이듯 자연스레 찾아냈다. 빚지고 살아갈 수 없는 거지 소녀의 인생에서는 받은 은혜를 목숨 바쳐 일해서 갚겠다는 생각은 아침이면 해가 뜨고 밤에는 달이 뜨는 대자연의 법칙처럼 당연했다.
오늘의 아침 식사도 풍족하다. 소녀는 따끈하게 데워진 빵에 살짝 녹은 버터를 발라 한 입 크게 베어 먹는 게 좋았다. 식기류를 제대로 써 본 적 없던 소녀의 검지 손가락은 버터나이프의 기능을 충실하게 해냈다. 손에 묻은 버터기름쯤이야 혀로 핥거나 윗옷에 쓰윽 닦아내면 그만이었다. 허겁지겁 눈길 닿는 대로 음식을 쓸어 넣은 소녀는 시중들던 하녀를 보고 물었다. 이제 뭘 하면 되죠? 하녀는 씽긋 웃더니 냅킨으로 소녀는 입 주변을 닦아주고 다정스레 옷을 털어주었다. 그녀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부드러움에 소녀는 문득 두려웠다. 평생 소녀의 몸에 닿는 손길은 거칠고 투박할 뿐이었는데. 사람을 만져줄 때는 손에 힘 조절을 해주어야 하는 거였나? 한껏 움츠러든 어깨를 풀고 소녀는 앞을 응시했다.
먼지 한 점 가라앉지 않은 식탁과 그 앞에 놓인 초라하고 지저분한 자신의 손. 거울처럼 번쩍이는 투명한 대리석 바닥과 몽실몽실 떠가는 구름을 실내에 넉넉히 담아둘 수 있는 만큼이나 높이 지어진 천장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꾀죄죄한 몰골이 부끄러웠다. 소녀는 자신의 얼룩진 모습은 아무리 많은 목욕을 하더라도 지워질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내가 여기에 더 있다가는 이렇게 깔끔하고 화려한 왕궁이 누추하고 악취가 나는 쓰레기장으로 돼버리겠지. 아무리 이곳이 좋아도 나는 진짜 공주가 아닌걸. 나는 포크를 쓸 줄도, 진짜 공주처럼 우아하고 교양 있게 먹지도 못해. 이렇게 큰 의자에 앉았는데도 저 밑에까지 다 흘리고 먹어서 주변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잖아! 울상이 되어버린 소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곁에 조용히 서있던 하녀는 이번에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주님. 당신은 왕께서 선택하신 그분의 소중한 딸이에요. 천사는 이렇게 말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흠잡을 데 없는 목소리와 말투였지만 소녀는 그녀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녀 스스로에게 떠오르는 반증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니에요! 저는 공주가 아니에요. 저를 잘못 보신 게 틀림없어요. 사실 그냥 공주인 척 조금 더 있어보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저를 좀 보세요. 저는 공주가 될 수 없는걸요. 운동장만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것보다 땅바닥에서 음식을 주워 먹는 게 더 편해요. 저는 평생을 그렇게 거지로 살았다고요!
잠시라도 공주인 척 그렇게 살아보려 했다. 자신만 입 다물고 있으면 어쩌면 그가 진짜 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한동안은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소녀 자신을 뺀 완벽한 장소와 분위기에 그녀는 압도당하고 말았다. 나는 공주가 아니야. 나는 앞으로도 공주가 될 수 없어. 소녀는 벌떡 일어나 대문을 향해 달려갔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을 합치면 겨우 하루를 신세 진 거니 욕이나 시원하게 한 번 하고 훠이, 먹고 떨어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족할 것 없는 사람들이니 그 쯤이야 일도 아니겠지. 혹여나 붙잡힐까 두려워 소녀는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갔다.
누군가 달려오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왕궁은 조용했다. 새소리만 이따금씩 들려올 뿐 고요하고 아름다운 왕궁에 급박함이란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나만 없으면 되는 거야, 이대로 빠져나갈 수 있겠어! 소녀는 안도했다. 앞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소녀는 미처 앞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쿵 부딪혀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망했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녀는 충분히 쓰라렸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니? 소녀의 쓰라림을 달래줄만 한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잡힌 거나 다름없지만 왠지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라면 조건을 제시하면 슬쩍 소녀를 빼돌려 줄 것도 같았다. 소녀는 툭툭 털고 일어나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가야 해요. 진짜 공주가 아니거든요. 한 번만 못 본 척 절 보내주시면 이 은혜는 어떻게 해서든 갚을게요. 얼굴을 보니 연신 방긋 웃기만 하는 이 사람은 대체 무슨 꿍꿍이지. 이 왕궁 사람들은 대체 뭘 먹고 이렇게 사람 좋은 인자한 미소만 남발하는 거야. 소녀는 은근슬쩍 화가 치밀었다.
왜 진짜 공주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니? 남자는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여유롭게 물었다. 그야 저는.. 거지니까요! 저는 길바닥에서만 평생을 살았어요. 소녀는 그가 이렇게 당연한 질문을 한다는 것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는 이런 당연한 질문쯤은 두루마리에 백 가지는 넘게 적어놓은 듯이 자연스레 다음 질문을 했다. 왕께서 너를 공주로 불러주신 건 어떻게 생각하니? 그는 정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해서 물어보는 걸까 소녀는 망설였다. 학교라고는 가보지 못한 소녀지만 어쩐지 국어는 이 사람보다는 자신이 더 잘하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불러주시면 뭐해요, 전 공주처럼 행동하지 못하잖아요! 소녀는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혹시 이런 쓸 데 없는 질문으로 자신을 이곳에 가두어 두려는 속셈은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부엌이라도 쓸고 닦아서 하루치 일당을 채우는 게 낫겠다 싶을 무렵 남자는 말을 이었다.
왕께서 너를 사랑하셔서 공주로 불러주셨어. 네가 공주로 태어났거나, 공주처럼 행동했기에 사랑하신 게 아니란다.
소녀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소녀는 어느 날 갑자기 왕이 불러 공주가 되어 이 왕궁에 살게 된 게 맞았다. 하지만 뜬금없게도, 왠지 그의 말을 듣자 자신의 공주 답지 못한 행동이 어느 곳 하나 나무랄 데 없이 괜찮게 느껴졌다.
네가 식탁에 앉아 두 손으로 밥을 먹고 주변을 온통 지저분하게 만든 것은 맞지.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공주가 하는 일반적인 행동은 아닌 게 맞단다. 하지만 네가 거지일 때와 같이 행동했다 하더라도 너를 공주로 부르신 왕의 마음은 변함이 없어. 왕에게 사랑받는 공주로 살면서 잘 모르는 건 배워가면 되는 거란다. 앞으로 어떻게 공주답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말을 하고 사람을 대하는 지를, 천천히 오랜 시간에 걸쳐 배우면 되는 거야. 배우면서 실수를 하더라도, 여전히 예전 습관대로 행동하더라도 네가 공주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너를 택한 왕은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가 무궁하신 분이거든. 그분은 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인생을 알고 계시고, 네가 어떤 습관으로 하루를 사는 지도 잘 알고 계신단다. 그러니 너의 모든 부자연스러운 행동들에 그분은 놀랄 일도 없지. 그럴 수밖에 없는 네 환경과 삶을 이해하시거든.
소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통 말이 되지 않는 말을 이 분은 끝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왕을 만나고 싶었고 자기를 이해한다는 그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서서히, 소녀는 자신도 언젠가는 진짜 공주처럼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마음에 떠올리고 있었다.
잠잠히 듣고 있던 공주는 그에게 물었다.
어디서 왕을 뵐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