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링 Mar 18. 2022

비 내린 우리의 300일

여전히 아름다운지


퇴근 한 지 다섯 시간 삼십사 분 째.

후다닥 저녁밥을 해 먹고 설거지는 남편에게 맡긴 채

온몸을 축 늘어뜨리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몇 초간의 웃음, 충격 그리고 충동을 일으키는 짧은 동영상을 끊임없이 넘겨가며. 사랑하는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쾌활하게 조잘대지도 못하겠는 날이 점차 많아지는 요즘이다.


왜 매일 바쁘게 살아야 할까.

혼이 다 빠지도록, 온몸에 힘을 그러모아 직장에 모두 쏟아붓고 나면 남는 것은 후회와 자책과 원망이 대부분인데.


아빠가 고치라고 이야기했던 나의 일희일비의 삶.

어제는 반짝이는 로 가득했다면 오늘은 그저 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인 것뿐이다 마는, 그럼에도 온몸에 스며든 축축함을 참고 꾹 견뎌야만 한다는 게 꺼림칙하다. 볕에 두면 흔적도 없이 날아갈 빗물처럼 이 또한 곧 지나가리라 되내지만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번져버린 눅눅함은 쉽사리 가실 줄을 모른다.


오늘은 남편과 연애한  300.

퇴근하는 내게 빨간 장미 다섯 송이를 안겨준 나의 소중한 남편과 함께 한 지 벌써 10개월이라니. 밝게 웃으며 고마워, 사랑해요 표현했지만 그리고 잠시나마 정말 기분 좋았지만 오늘의 새빨간 장미는 이내 흑백의 꽃으로 시들어버렸다.


 저녁 시간 내내 기운이 빠진 마누리는 그저 남편 옆에서 비비적거리며 새우잠을 잤다가, 과자를 우걱우걱 씹었다가, 실시간으로 연결된 동생들과 카톡으로 신나게 대화를 했다. 그러고 나서도 풀리지 않는 찜찜함으로 글을 쓴다.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먹게 하신다더니.

하나님 진짜 너무하시다. 이 정도 수고로움일 줄은 몰랐지. 과연 퇴사면 끝나는 문제인가? 다른 건 몰라도 인생의 무거움은 나이와 정비례로 점차 가중된다는 것쯤은 안다. 육아에는 퇴근도 없다는 말은 24시간을 땀 뻘뻘 흘려야 한다는 말이겠지. 왜 이리 힘들어야 할까.


쉬고 싶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치지 않을 정도의 수고로움을 감사히 즐기고 싶다. 주어진 일을 성실히 감당하면서도 나의 실수에 의연하고 남의 서투름에 관대하여 내 마음이 지치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  솔직한 마음을 써보자면 실수하지 않고 잘했으면 정말 바랄 것이 없겠다. 오늘 내가 맞은 비는 직장에서 의도치 않게 저지른 실수였다.  번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던 오타  글자.  실수로 억울하게 혼쭐이    자리 동료. 그걸 틀리다니. 그런 실수를 아직까지 하고 있다니.


오은영 박사님은 매일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새날이 밝았구나, 너그러운 마음을 품으라 한다. 수천번 수만 번을 이야기했어도 아이가 또 그 짓을 하면 다시 외치라 하셨다. 새 날이 밝았구나.


서른 하나, 어른의 모습을 한 채 어딘가 아이와도 같은 태도를 보이는 내가 떠오른다.


하나님 감사해요, 찬미의 눈물을 흘리던 어제와

하나님 난 왜 이래요? 볼멘소리로 눈을 흘기는 오늘을 사는 불완전한 쪼꼬미의 위태로운 하루하루.


 이런 나에게도 새 날이 밝았구나, 기다리시고 다정스레 한 번 더 일러주실 분이 있다.


 어제는 웃었고 오늘은 우는 날이 반복될 지라도, 그때는 만렙 같았으나 지금은 쪼렙 같은 인생을 산다 할 지라도 그 모든 인생의 조각조각을 들어 사용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 결국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


그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 그분의 영광이라는 목적과 나를 위해 계획하신 영원한 즐거움이 서로 맞물려 움직인다. 이것이 나에게 기쁨이 되는 이유는 그분의 섭리가 “영원” 하기에 그렇다. 그와 함께하는 영원의 시간 가운데 나는 또 실수할지 모르고 얼마든지 엎어질 수 있으며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나, 나의 하나님은 그런 내게 새 날의 은혜를 주신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의 마음을 들어 그의 존재를 바라보게 하신다.


빗물에 젖어 새빨간 장밋잎이 검어졌어도

여전히 남편과 나의 300일은, 우리의 오늘은 아름답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보, 나 똘끼가 생겼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