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사모의 퇴사이야기
중간 관리자가 되고 진절머리가 나는 한 해였다.
하나님을 붙들고 또 붙들다가, 이 악물고 견디고 견디다 못해 저 더는 못해요, 퇴사할 거예요! 해버렸다.
처음엔 사람이 싫어서였다. 탈탈 털리고 남은 나를 보니 힘이 많이 빠진 내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기는 했어도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에 이른 듯해서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다), 나를 위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씁쓸한 건 아무래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도 인정과 사랑이 필요한 나인데,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알아주는 이는 없었고 이미 이런 환경에 적응한 줄 알았음에도 나는 여전히 인정받으려 소리 없이 안간힘을 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야 말로 그만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가 필요했던 또 다른 명분은 바로 아내 또는 엄마로서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결혼을 통해 아내바라기인 남편이 생기니 나도 아내의 역할을 잘 해내고 싶었다. 좋은 음식을 차려 먹이며 건강한 식습관을 잡아주고, 여유롭게 땀을 내는 운동도 같이 하고, 고요한 밤을 보내다가 너무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드는 일들. 직장에 다니면서는 꿈도 꿀 수 없는 평범한 루틴을 이쯤에는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결혼은 나 혼자 대충 살면 되는 삶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은 탓이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크나큰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가 바로 남편과 아내의 위치였다. 사랑하는 남편을 성심성의껏 돌보지 못하면 나중에 아기가 생겨 엄마가 되었을 때도 허둥지둥 댈 것 같았다. 나의 게으름으로 한 아이의 삶에 행여 나쁜 영향을 미치고 싶지는 않았으니, 나는 내 경력보다는 주부로서의 역할에 집중하기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 알겠죠? 그러니까 지금 꼭 퇴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정 안되면 막아주세요! 그동안 이만큼 참고 기다렸으면 됐잖아요!
하나님께 퇴사를 통보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유와 명분은 충분함에도 하나님께서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지난번에 퇴사하겠다고 발을 동동 구를 때는 참으라고, 인내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왜 조용하실까? 내가 하도 난리를 치니 화가 나셨나? 하나님의 막으심은 없지만 그렇다고 나의 통보에 응답하시는 평안함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더 이상한 건 대표님과의 대화도 잘 흘러가지를 않는다는 점이었다. 퇴사를 말씀드리는데도 들은 척 만 척, 이렇다 저렇다 결론은 안 내시고 시간을 버는 느낌이랄까. 물론 쉽게 Yes 하실 것 같지는 않았다만. 아니 그래도 이게 아닌데. 순조로운 마무리는 하나님의 뜻의 여러 사인 중 하나인데, 아무것도, 하나도 순조롭지가 않다!
불안해진 마음으로 하나님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건 바로 퇴사 후의 삶을 책임질 능력이 내게는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현명한 주부가 될 계획도, 아이를 임신할 수 있는 능력도. 충동적인 결정으로 퇴사하면 닥치게 될 또 다른 광야의 시간을 도저히 스스로 버틸 재량이 없는 것을 마주하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분이란 것은 알지만, 이렇게 실수해도 최선으로 이끄실 분임은 기억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런 마음이 들었으니 나는 기도해야 했고 하나님께 다시 물어야만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 목사님의 동기 부부를 만나고 온 날 하나님께서는 내게 새로운 마음 하나를 열어주셨다.
다름 아닌 회개였다.
힘들다는 이유로 내 마음대로 퇴사를 결정하고 하나님께 통보했다는 것. 내 인생의 기관사 되시는 하나님 옆에서 거기 이제 싫으니까 제발 그만 가라고 눈을 질끈 감고 브레이크를 당겨버린 꼴이었다. 그 다음 향방을 알지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운전할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제 멋대로 나섰구나. 하나님 제 마음대로 결정한 것을 용서해 주세요. 제 인생을 책임지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제가 주인 되어 결정했음을 회개합니다.
얼어있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지니 하나님 앞에 평안한 마음으로 고백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나의 최종 퇴사 시기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었다.
대표님은 그간 내게 퇴사 시기를 끊임없이 뒤로 밀어오셨다. 일 년만 더, 반년만 더, 삼 개월만 더! 나는 나의 퇴사 권한을 침해받는다 생각해 왔던 터라 실랑이를 할 수밖에 없는 참이었다. 한 편으로는 대표님의 입장이 이해되어 단칼에 거절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나는 내 입장이 먼저니 대화가 원만히 마무리되지 못한 것이었다.
소심한 내게는 그만큼 머리 아픈 과정이었고, 무엇보다 이 과정에 있어 하나님의 뜻이 마음에 걸려왔던 시간이라 오히려 하나님께 맡기는 편이 더 감사했다. 그게 언제가 되었든, 대표님의 입을 통해 나오는 시기가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는 시기일 거라고. 언제가 되었든 나는 순종하겠다고. 부족하지만 이 작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다시 한번 고백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어찌 보면 핑계인 것 같다. 얍삽하기도 한 선택이다. 지가 하겠다고 덩실덩실 나대더니 현실을 깨닫고 바로 엎드리는 모습이. 애초에 누가 주인인지를 바로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래, 이게 성화의 과정이려니. 이렇게 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의 커지심을 몸소 배워가는 것으로 감사.
한결 평안해진 마음으로 대표님과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두려운 마음보다는 두근두근 기대되었다. 하나님의 대답을 듣는 기분이니 어떠한 대답이든 나는 순종할 준비가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더라. 막상 듣고 순종할 만한 기간이 아니면 어쩌지 싶기도 했고. 하지만 그마저도 하나님의 응답이라면 순종해야지 싶어 잠자코 기다렸다.
대표님이 제안하신 건 3월 한 달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알겠다 말씀드렸는데, 만약 기도하지 않았다면 감사로 승낙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3월까지 해주고 나가기로 했다는 걸 들은 주변의 당연한 반응은 뭘 그렇게까지 해주고 나오느냐 가 전부였다. 가장 힘들 3월, 온갖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 게 눈에 불 보듯 보이는 그 한 달을 굳이 왜 더 해주느냐고. 다들 내 걱정으로 인한 맞는 말들을 해주었지만 내겐 사실 아무렴 상관없었고, 그렇게 해주는 게 알고 보면 나의 짐을 덜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 오히려 덤덤하기도 했다. 몸이 힘들어도 차라리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따라 하는 게 내 마음이 가장 편안한 것을.
더는 내 멋대로 살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원래도 강박이 있는 인생을 살아왔으니 어쩜 익숙한 방식이기도 하다만, 남편 목사님을 만나 살고 있는 제2의 인생에서는 전보다 더욱 내 의지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남들은 퇴사가 나의 권한이라고 말할지언정, 세상은 퇴사가 합의가 아니라 통보여도 괜찮은 거라 조언할지언정. 나의 모든 출입은 결국 하나님 앞에 있기에. 내가 일하는 그 자리가 주께서 보내시고 허락하신 자리였음을 인정하는 만큼, 주님 가라 하시는 그때를 기다려야 함이 내게는 더욱 당연해진다.
하나님, 이제 저 진짜 퇴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