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피하는 방법
자꾸 죄짓는 것이 이상하다.
예수님이 대신 죄의 삯을 치르셨고
그분의 공로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아
죄로부터 자유함과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삶을 얻었는데.
어느 순간 다시 죄를 만난다. 눈 뜨면 죄를 짓고 눈 감으면 죄에 짓눌리는 캄캄한 구덩이 같은 곳에서.
하나님 믿는 사람이니 이러면 안 된다, 죄를 다스리고 채근한다. 가슴을 토닥이며 타이르고 때로는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며 제발 이러지 말라며 발버둥 친다.
노력할수록 늘어나는 건 경계선조차 희미해지는 죄책감의 짙은 그림자와 머리카락 보일라, 하나님으로부터 꽁꽁 숨는 숨바꼭질 같은 일상의 날들.
은혜의 자리에서 죄악의 골짜기를 반복하는 삶에서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가 곧 실패의 슬픔에 잠긴다. 하나님 곁에 있을 때 죄의 존재는 희미하지만 그 은혜의 결에 닿지 못하는 날에는 그새 언제 어디서 왔는지, 호시탐탐 노리던 죄가 눈을 부라리며 성큼 다가와 한 손에 멱살을 움켜쥐니 겨우 숨을 헐떡인다.
친구와 우스갯소리로 사단만큼 성실한 놈도 없을 거라 했던 말은 실제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죄는 끊임없는 전력질주로 추격할 테다. 매일, 매 순간 그리고 모든 생각 가운데 죄는 요이땅 준비자세로 한 곳만을 노려본다. 목표는 하나.
하늘에 구멍이 뻥 뚫려 폭우가 퍼붓는 것처럼 죄의 공격은 멈추지 않는다. 스스로 폭우를 멈춰낼 재간은 없다. 흩뿌려지는 죄의 물줄기는 당연하게도 머리부터 적셔낸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머리라도 가려보지만 더욱 세차게 내리치는 죄는 우스운 손짓이라는 듯 머리 가닥가닥을 찾아내 송골송골 맺힌다. 치기를 부려 그래 어디 한 번 더 내려봐, 두 주먹을 위로 향해 휘둘러 싸운다 한들 얼굴을 타고 들어오는 죄로 인해 눈도 못 뜰 게 뻔하다.
죄가 빗발치는 아침을 맞이하며 악하고 더러운 물에 발끝까지 구석구석 흠뻑 젖어 눈물 뚝뚝 떨군다.
우산이다.
양쪽 어깨 끝을 덮고도 남을 넉넉한 크기의 우산이 있으면 힘 안 들이고 비를 피할 수 있다. 죄의 비를 막아줄 하나님의 은혜의 우산이 떠오른다. 그분의 임재와 따스한 은혜가 그립다. 축축한 빗물이 들어차 끈적거리는 공기마저 차가운 곳과는 비교될 수 없는 곳. 사랑의 온기로 보송보송 보드라운 이불속 한 숨 편히 자고 일어나도 아무런 걱정 없이 부스스 깨어나 싱긋 웃을 수 있는 주님의 품.
죄는 희뿌연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으며 지니 대신 요술램프에 가둬 당분간 막아둘 수도 없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 겨루어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린 다만 죄를 피해 갈 뿐이며 예수님의 보호하심 아래 그분에게 시선과 마음을 맞추고 걸어갈 때만 죄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 죄가 주인 노릇하는 이 세상에 오셔서 승리해주신 분은 예수님이고 그 분만이 온전히 죄를 정복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죄악의 빗줄기에 휩싸였다 해도
살기 가득한 정죄로 자신을 괴롭히거나, 초점 잃어 멍해진 눈빛으로 무기력하게 우두커니 죄의 폭우에
서있지 말자. 예수님을 찾아 그의 품 안으로 피하면 된다. 당신을 족히 감싸고도 남을 큰 우산을 준비하시고 어여 내 곁으로 들어오렴, 손 내미신다.
이제는 인정한다.
자꾸 죄짓는 것이 당연하다.
어느 순간 죄를 다시 마주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진짜 이상하다 여겨야 할 것은 죄 그 자체가 아니라 죄에 반응하는 도가 지나친 정죄함과 될 대로 돼라는 식의 무기력함이다.
물론 이 조차 그분 특유의 사랑으로 해결해내실
것을 믿으니 크게 조급하지 않다.
아무리 강력한 죄의 폭풍우와 기약 없이 길어지는 악화된 장마에서도 그분은 당신을 구조하는데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으시니까.
죄악에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위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소매를 걷고 첨벙 뛰어들어 안전한 뭍으로 끌어 건져내 주실 것이다. 언제까지나 변함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