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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링 Feb 03. 2021

7세의 생일 축하법

수동의 기쁨, 능동의 행복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주인공이 갇혀버린 날은 

2월 2일이다. 그의 발목을 잡아 오도 가도 못하게 가둬두었던 날.수많은 밤을 지내도 여전히 2월 2일이었다.


오늘도 2월 2일 중 하루였다.


달력에 적힌 날짜가 2월 2일인 것과, 내가 태어난 날이란 것을 빼면 어제를 복사 붙여 넣기 한 것과 다르지 않은 그냥 또 어느 요일.


2019년도 오늘은 좋아 죽겠던 남자가 꽃다발과 케이크, 선물로 행복하게 해 줬던 날이고

2020년도 오늘은 좋아지려던 남자랑 스테이크를 썰고 손 잡고 남산으로 걸어간 날이다.

2021년도 오늘은 좋든 싫든 덤덤히 출근한 날이다. 혼자 보낼 수는 없어 친구와의 저녁 약속으로 일정을 겨우 메꿔놓은.


아침부터 간간히 전해지는 축하 메시지와 선물이 고마웠지만 고요한 화요일인 건 변함없다. 반면 직장에서는 정전으로 난리 블루스다. 불이 나가며 전 직원의 멘탈도 같이 나갔다.오늘의 주인공은 너야 너. 정전 너어. 세상 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살아서 좋겠다. 주연 자릴 놓쳐 괜한 소릴 해본다.


아무렴 어때. 폭풍 같은 사랑으로 넘치는 이벤트 해주는 남친 없으면 뭐든 Whatever. 차분히 일을 시작한다.


어두운 교무실에서 숙제를 채점하고 일을 보던 차에 아이들이 내게 들이닥쳤다. A4용지 4분의 1로 자른 사이즈의 카드를 두 손으로 내밀며 Happy Birthday, teacher.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 후로도 계속 두세 명씩 짝 지어 나를 찾아왔다. 자기가 그린 그림과 직접 쓴 영어 글이라며.


오늘이 시작된 지 10시간 20분쯤 지나고 나서야 오늘 내 생일인가, 처음으로 실감이 났다.


3교시 수업하러 교실로 들어서니 아이들이 One, Two, Three 서로 사인을 주고받는다. 숫자 3을 다 세기도 전에 들쑥날쑥 한 음도 맞지 않는 합창으로 Happy Birthday to you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Did you eat cake?
Did you say thank you to your mom?
I will give you a present tomorrow!
I love you so much!


애교를 비장의 무기로 삼는 우리 반은 항상 궁금한 것도 많다. 하지만 이런 질문이라면 언제든 환영해.

선생님 엄마가 지난 토요일에 케이크랑 선물을 사줬다고, 너무 행복했다고. 선물은 이 카드만으로 충분해, 정말 고마워. 사랑해 얘들아 해주었다.


로맨스가 아니면 생일도 아무런 의미 없을 거야, 단정 지어 딱딱하게 말라비틀어진 마음에 7살 아이들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은 내게 촉촉한 생명수를 흘려보냈다. 흠뻑 젖어 뿌리까지 흥건히 젖도록.


그제야 차가움에 눈먼 내게 희미한 형상 하나가 아른거렸다.


Birthday Boy와 Birthday Girl이 신이 나서 하루를 넘치는 웃음으로 보낼 때 이만큼 관심 가져주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않은 내 모습이었다.애들한텐 생일이 대단한 거겠지, 막연히 상상만 얼추 하며.

생일 별 거 아닌데, 아무도 모르게 반박하고 냉소 지었던.


우리 아이들이 내게 해 준 것처럼, 케이크는 먹었는지, 선물은 무엇을 받았는지, 기분은 어땠는지 왜 눈 마주치며 묻지 못했지. 응당 해야 할 질문만 기계적으로 퍼부어 놓고는 왜 더 깊은 애정을 담아 아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주어 내가 정말 기쁘다고,

너를 만날  있어 우리 모두가 행복하다고. 온 몸으로 표현해주었으면 좋았을껄.


고심 끝에 구매했을 선물과 바쁜 와중에도 잊지 않고 보내준 메시지가 얼마나 큰 정성인지 알고 있다.

많은 사람을 챙겨야 하는 게 버거울 텐데 내게 그리 신경 써준 것이 절대 당연하지 않다.


그런데도 꽁꽁 얼어붙은 나를 스르륵 녹여버린 것은 고사리 같은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적은 얇디얇은 카드 한 장이었고 연습 한 번 없이 즉석으로 맞추어 부른 소란함에 가까운 노래 한 곡이었다.


나를 사랑한다 고백하는 아이의 꿀 바른 눈빛이,

내가 기쁜 것이 마냥 행복한 아이의 투명한 마음이 나를 이토록 신나게 했다.


생일을 맞이한 오늘이 정말로 짜릿했다.

무조건적으로 사랑받고 마음의 정성과 물질의 선물을 누릴 수 있는, 수동의 기쁨으로 가득 찬 날이어서.


생일을 다 보낸 내일을 진정으로 기대한다.

받는 기쁨이 어떠한 지를 깨달았으니 비슷한 결의 정성과 사랑을 전해줄  있는, 능동의 행복을 선택할  있는 이니까.


사랑받는 것과 주는 것의 정해진 순서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먼저 사랑 넘치게 받았으면 이제는 그 사랑 자연스레 주면 된다. 나서서 사랑을 거저 주었다면 다음에는 이 사랑 눈덩이 굴린 듯 커져서 돌아올 테니.


내가 뭐라고 이렇게 까지 축하해줄까, 모두에게 감사한 날이다. 뭐 그리 특별한 인간이라고 그의 모든 것 내어주셨을까, 하나님께 감동인 밤이다.


다음 생일은 Sarah 차례다.

딱 기다려, 선생님이 넘치도록 축하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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