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해보기로 했다. 편하게.
힘이 좋으셔서 되게 잘하시네요!
맞아요, 그렇게 하는 거예요!
봉을 잡고 한 바퀴 휘리릭 돌고 나니 선생님께 첫 칭찬을 들었다.
악력이 약해 잼 뚜껑 하나 못 여는 내게 힘이 좋다니.
절로 돌아가는 봉에 3초간 전신을 이 악물고 비벼댔을 뿐인데 이게 맞다니.
기타 레슨을 시작하고 줄을 튕길 때마다 오구 잘했네요 해주는 강사 덕분에 일상의 작은 힐링을 경험한다던 아는 동생의 말이 맞았다.
생글생글 웃어주시며 한 동작 시도할 때마다 칭찬해주시는 선생님 덕분에 첫 폴댄스 수업은 나름 성공이다.
선생님의 시연 후에는 각자 봉 위에서 포즈를 잡고 연습한다. 감이 오지 않을 때엔 일단 둘러봐야지. 가냘픈 라인을 뽐내며 봉을 놀이터 삼아 노니는 젊은 언냐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도 언젠간 저 위를 마음껏 뛰어놀겠다는 두툼하고 단단한 목표가 똬리를 틀었다. 저런 매력적인 선을 리본 휘두르듯 그려내려면 몇 달이나 걸릴까.
성실 빼면 봐줄 것 없는 사람이라 세상 일 어찌 돌아가는지 경험으로 대충은 안다. 어설프고 어려워도 배우고 반복하면 초보 티를 벗고 보통의 옷을 걸칠 수는 있더라. 영어와 티칭이 그랬고 그림과 글쓰기가 그랬다. 기술뿐 아니라 적응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막막하던 대학 생활이 가뿐해지고 말문이 막히던 캐나다 인턴쉽은 한국행 비행기표 앞에 눈물이 터질 만큼 아쉬워졌다. 아무 말 못 해 산 입에 거미줄쳤던 한 달이 지나자 밝은 걸 넘어 또 저러고 웃는다 는 소리를 빈번하게 들으며 일하고 있다.
오늘의 시작 또한 볼품없겠지만 3개월 후에는 봐줄 만할 거다. 손에 힘이 없고 유연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스윗한 선생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처음이던가 아니면 오랜만인 건가.
재고 따지지 않는 순수한 목표가 생기는 일 말이다. 그냥 잘해보고 싶은 이유 없는 이유.
영어가 돈벌이 수단이 된 이후로 미드와 입트영은 즐거운 취미가 아닌 부담스러운 공부 거리가 되어버렸다. 탈락.
몇 시간을 몰두해 그림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솟구치는 좋아요 욕심은 다 된 밥에 재를 빠뜨리는 격이다. 아 찝찝해, 뿌듯함으로 끝나지를 않네. 또 탈락.
발라당 뒤집힌 애벌레만 봐도 넘쳐나는 생각을 형상화할 곳을 찾다가 브런치에 도착했다. 디어 마이 브런치지만 남 눈치에 마이 부대끼는 공간이다. 인정 욕구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야너두? 탈락.
그에 반해 폴댄스는 그 자체로 사랑스러웠다.
높을 수 없는 기대치 때문이다.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폴댄스를 폴댄스로 보게 하는 이유다. 우월한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게 아니지 않은가. 뱃살 없는 납작한 배때기가 노출 부담을 줄여주는 것은 맞지만 그래서 뭐. 놀이기구의 짜릿함을 매주 두 번씩 봉 위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 만으로 폴댄스를 즐길 이유는 충분하다.
깃털 한 껏 세워 뽐내기 위한 치장 위주의 삶은 그만두련다. 취미는 건강한 쾌락의 영역에 고이 모셔두어야지. 손에 힘이 빠져 미끄러져도, 무릎 안짝과 발목에 살이 벌겋게 올라와도 기쁘기만 하다. 이런 흥미진진함에 이까짓 빨감 쯤이야. 앞으로 아플 것도 두렵지 않다. 온몸에 멍 밖에 더 들겠어, 취미는 기꺼이 손해 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