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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링 Dec 06. 2020

너와 나를 위한 거리두기

가족도 타인이다

코로나 확진자가 600명에 달한다. 서울은 앞으로 2주 동안 9시면 불 끄고 취침 모드로 들어간다. 확진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백신의 개발은 예상보다 더뎌지는 현실에서 정부가 강력하게 권고하는 것은 또다시 거리두기.


내가 바이러스를 지녔을지 내 곁의 당신이 이미 감염된 상태인 지 모를 때는 별도리 없이 둘 사이에 최소한의 간격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나를 지키고 당신을 보호하며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다. 나 없는 우리는 없고 당신이 빠진 관계는 어딘가 허전할 뿐이니.


지나치게 강조해도 과하지 않을 이 시대의 “거리두기” 운동은 이제야 그 존재를 명명해주는 이름을 찾았을 뿐 코로나 바이러스가 생기기 전, 진작부터 존재했다.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우리 가정에서 말이다.


만연한 가부장제가 약자를 쥐고 흔드는 시대. 집안에서 흐르는 당연한 기운이 어딘가 의심쩍어도 일단 입 꾹 다물어온 세대. 그러나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꼰대의 시대에 이내 약한 금이 생기니 그 주변으로 무수한 줄이 뻗어나간다.


그들의 시대를 굳게 붙들던 가치는 말라 바스러지고 우리의 세대는 움츠러든 어깨를 펴고 숙인 고개를 높이 들어 열렬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옳고 그름의 문제로 사람을 벼랑까지 몰고 가 기어이 상대의 굴복을 받아내는 행태를 심리학 용어인 “가스 라이팅”으로 새롭게 정의했고 그로 인해 우리 모두에게 인정의 덫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버이 은혜는 감사하지만 그들에게 받은 상처는 방치하고 썩게 내버려 둘 하찮은 문제가 아니라 세심한 돌봄과 치료가 필요한 대상임을 분명하게 인지시키는 책 또한 앞다투어 출판되고 있다.


효율적으로 가스 라이팅을 차단하는 방법과 개인의 상처를 돌보는 일의 공통점을 찾자면 바로 관계 사이에 똑바른 선을 긋고 그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자는 것이다.


아빠를 쏙 빼닮은 나는 사랑받는 딸이 되고 싶었다. 방법은 전자레인지에 넣는 3분 카레 조리법처럼 간단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 두 번 곱씹을 필요 없이 “네 아빠.” 하면 곧 넘치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네 하고 대답할 때가 제일 예쁘다고 하셨으니 무조건 대답 먼저 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외국 생활 후 전과 달라진 나는 아빠와 시도 때도 없이 싸워 하루가 멀다 하고 냉전을 겪어야 했다. 마음 둘 곳 없는 이 전쟁을 끝내는 길은 죄송하다 사과드리고 고분고분한 딸로 돌아오는 것뿐이었다.


아기처럼 울먹이거나 사춘기 소녀처럼 공격적인 태도는 성숙한 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최대한 차분하고 분명하게 내 의사를 표현하려 노력했다.  아빠의 입장이 이해되지만 나는 마음이 여린 편이라 조금만 다정하게 잘 설명해주실 수는 없겠느냐 부탁드렸다. 나의 이런 요구가 당황스럽다는 아빠의 하늘 위로 높게 솟은 두 눈썹을 보고 마침내 깨달았다.


아빠는 늘 옳으신 당신이었다는 것과 나 또한 틀리지 않은 딸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아빠는 아빠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성격과 방식이 있는데 우리는 서로를 자신의 영역 안에 끌어들이려 안간힘을 써 서로를 밀치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한 사람만 서 있을 수 있는 크기의 영역 안에 또 다른 사람이 비집고 들어오려니 두 사람 다 편안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네가 들어와, 네가 나가.

네가 서 있어, 네가 앉아야지.


함께 완벽하게 서 있기 위한 자세를 찾느라 애써 실랑이 벌일 필요가 없다. 각자의 원 안으로 들어가 적당한 거리를 둔다. 나의 원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완벽한 딸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빠를 그의 영역으로 보내드린다는 것은 그가 나의 완벽한 아빠가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전혀 나쁜 게 아니라는 것도 말이다.

타인의 인정으로 완성되는 삶이 아님을 진정으로 알게 되면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큰 지 감히 상상이나 되는가?


혹여 이 모든 게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다면 이제는 물리적 거리두기를 해야 할 차례이다. 착한 아들딸 리스트 중 “부모님 자주 뵙기”는 눈 딱 감고 지워보자. 대신 내 공간에서 한 주 더 머무르며 나를 위한 온전한 시간을 갖는다. 온갖 종류의 원망, 불평, 서러움 그리고 외로움을 홀로 덜어내고 견뎌낸다. 부정적 감정을 치워낸 그 마음에 다시 또렷이 새겨야 할 것은 나는 나 혼자 내 존재 이대로도 괜찮다는 마음이다.


전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2주 만에 본가에 내려가니 부모님이 현관까지 쫒아와 두 팔 벌려 환영하신다. 아유 잘 지냈어?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주는 어색하고 서투른 애정표현이지만 이로써 정서적, 물리적 거리두기의 효과는 빛을 발하는 셈이다.


한 지붕 아래 살 비비며 사는 가족도 결국은 타인임을 잊지 말자.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최선을 다해 사랑할 때 최고의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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