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을 한 바퀴 걷는다는 것

by 블리

서울둘레길을 걷다가 알게 된 또 하나의 길, 한양도성길.


이름은 익숙했지만, 직접 걸어볼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성곽을 따라 도심 한가운데를 걷는 길이라는 설명이 마음을 끌었다. 낙산공원부터 남산, 인왕산까지 이어지는 비교적 짧은 코스라는 말에 ‘이건 하루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시작은 정말 우연이었다.
낙산공원에 산책을 갔다가 발견한 한양도성길 스탬프. 지도에 도장을 찍는 방식이 흥미로워서 일단 지도부터 챙겼다. 밤길이라 본격적으로 걷지는 못했고, 그날은 낙산공원을 천천히 산책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대신 마음속에 작은 계획 하나가 생겼다.
이 길은 제대로 걸어봐야겠다고.


며칠 뒤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오전에 시작해 오후에 끝내는 일정. 혼자 걷는 길도 좋지만, 이 길은 함께 걷고 싶었다. 하루를 통째로 나누며 걷는 길은, 혼자보다는 누군가와 나누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날씨는 비가 올 듯 말 듯 흐렸지만, 계절은 가을이었다.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단풍은 이미 길 위에 내려와 있었고, 우리는 그 계절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숭례문에서 출발해 남산으로 향했다. 남산타워 아래 전망대에서 잠시 멈춰 사진을 찍고, 봉수대를 지나 다시 길을 이었다.


낙산공원으로 내려오는 길, 인왕산으로 향하는 구간에서 익숙한 풍경들이 스쳐 갔다. 이화학당 근처, 학교와 큰 교회가 있는 그 길.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익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분명 오래 기억에 남을 길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 스탬프를 찍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양도성길도 결국은 산이었다.
약 20km. 평소에 걷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루에 몰아서 걷기에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왕산이라는 이름이 주는 묘한 신뢰 덕분인지, 발걸음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풍경은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했고,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걷는 김에 플로깅도 함께했다. 길 위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인왕산 정상에 올라 인증 사진을 남겼다.
서울 안에 이런 풍경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계단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이렇게 높은데 300m도 안 된다고?’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여러 번 맴돌았다.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이제는 내리막을 기대하게 된다. 그렇게 마지막 스탬프까지 찍고, 동서남북 한 바퀴를 완성했다.


인증서를 받으러 가는 길은 한결 가벼웠다.
잠시 기다리자 뱃지와 증서를 건네받았다. 하루 만에 잘 걸었다는 사실이 꽤 뿌듯했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라, 친구와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며 걸을 수 있어서 길이 덜 외로웠다.


서울둘레길에 이어 한양도성길까지.

길을 하나 완주할 때마다, 다음 길을 자연스럽게 찾게 된다. 이제 또 어떤 길을 걸어볼지, 괜히 지도를 들여다보게 된다.


알게 모르게, 지역마다 길은 존재한다.
관심이 없을 뿐이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결국 길 위를 걷기 위해 계속해서 찾아보고, 도전한다. 나 역시 이제 막 그 열의가 올라온 사람이다. 혹시 아직 길에 관심이 없었다면, 집 근처에 어떤 길이 있는지 한 번쯤 찾아보면 좋겠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생각보다 좋은 길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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