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의 올레길이 ‘완주’를 향해 숨 가쁘게 걷는 길이었다면, 2025년의 올레길은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춘 길이다.
놀멍 쉬멍, 그리고 쓰레기를 주우며 걷는 조금은 색다른 선택. 나는 그렇게 ‘클린올레’를 걷기 시작했다.
2025년 2월, 제주 올레길 437km를 완주하고 나서 다시 올레길을 걷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완주라는 목표를 이룬 뒤, 그 길은 한동안 내 마음에서 끝난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주에 살게 되면서 마음이 달라졌다.
빨리 걷지 않아도 되는 길, 어디에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은 길,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 자체를 온전히 누리고 싶은 길로 올레길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완주’가 아니라 ‘클린올레 완주’를 목표로 정했다.
올해와 내년을 지나며 437km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채워가기로 했다.
첫 시작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14-1코스. 제주올레 패스포트 수첩을 챙겨 시작점에 도착했지만, 클린올레는 공식 안내소에서 봉투를 받아 역방향으로 걸어야 클린하우스를 만날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봉투 하나를 챙겨 들고, 도착지점인 오설록으로 이동해 첫 도장을 찍은 뒤 그렇게 오늘의 길은 거꾸로 시작됐다.
관광객들 사이에서 올레꾼처럼 걷는 사람은 아마 우리뿐이었을 것이다.
지난번엔 날씨가 좋지 않아 자연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는데, 이날은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다.
올레길 표식만 따라가면 길을 헤맬 일도 없었고, 관리 상태가 잘 느껴질 만큼 쓰레기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설록에서 곶자왈 구간까지는 쓰레기를 줍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로 길이 이미 충분히 깨끗했다.
문도지오름 출구 앞에서 중간 스탬프를 발견했다. 곶자왈을 벗어나자 차가 다니는 도로가 나오고, 그와 함께 쓰레기도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소나기처럼 비가 쏟아졌지만,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은 금세 걷혔다.
제주의 날씨는 늘 그렇듯, 예고 없이 왔다가 미련 없이 떠났다. 중간 스탬프를 찍고 문도지오름으로 향했다. 이곳은 사유지이자 목장으로, 방목된 말들이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곳이다. SNS로 유명해지며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말들이 사람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말굽에 맞은 사례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곳은 인간의 공간이 아니라, 원래 이곳에 살고 있던 존재들의 삶의 터전이라는 것을.오름에 오르자 굳이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말 세 마리가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잠시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다시 길을 따라 저지리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서 올레길 표식과 같은 파랑과 주황이 자연 속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장면을 만났다. 괜히 반가워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저지리에 들어서자 귤나무 향이 진하게 퍼졌다.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순간이라며 귤나무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담배꽁초, 담배갑, 기념품 상자처럼 사람이 머문 흔적들이 보이는 구간에서는 봉투가 금세 묵직해졌다. 이렇게 예쁜 길에서 사진을 더 남기지 못한 건 삼각대를 챙기지 않은 탓. 다음엔 꼭 가방에 넣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걷는 내내 코스모스와 댑싸리, 봉숭아 꽃을 보고 도토리를 줍고, 쓰레기를 줍고, 저지리 마을길은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기에 충분했다. 길에서 만난 책방 소리소문은 지난여름 잠시 들렀던 기억이 있어 더 반가웠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어가 책을 구경하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책 한 권을 골라 나왔다. 갈 때마다 사람들이 많은 그 풍경이 참 좋다.
다시 공식 안내소로 돌아와 시작점 도장까지 야무지게 찍고, 쓰레기 분리배출을 마치며 이날의 클린올레를 마무리했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과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누고, 쓰레기를 줍는 모습을 보며 건네받은 “길도 깨끗하게 하네~”라는 말 한마디에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가벼워졌다.
완주를 향해 걷던 날들보다, 이제는 진짜 올레꾼처럼 천천히 걷고, 쉬고, 먹고, 바라보고, 길을 닦으며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
클린올레 완주.
끝까지, 나답게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