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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서윤 Apr 17. 2019

저의 책임이었는데
저는 작가님 탓을 해왔습니다


웹툰 제작을 처음 시작할 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웹툰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몰랐고,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다 보니 나는 그저 "0"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제로의 인간이라는 것을 들키기 싫었고, 그래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을 했다. 게다가 같이 일하는 웹툰 작가들을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나는 어정쩡한 포지션으로 작가들과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쩔 때는 작가 편에 섰다가 어쩔 때는 고객 편에 섰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포지션에서 나는 점점 일을 이상하게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결과물도 이상했다. 작품 퀄리티는 점점 더 낮아졌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너무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때 같이 일을 했던 작가와 어제 통화를 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만나지 못했다. 서로의 미팅 일정을 조율하기 어려웠고 결국 몇 번이나 일정이 밀리고 밀려서 나는 우선 지금 당장 만나서 이야기하기보다는 전화통화를 하자고 요청했다. 전화로 이야기를 해도 되는데 나는 이 정도의 중요한 이야기라면 만나서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몇 달 동안 작가에게 하고 싶던 말을 하지도 못하고 늘 마음속에 가지고 다녔다. (사람의 생각은 한 번 굳어지면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힘이 있다.) 


내가 작가에게 하고 싶던 말은 한 가지였다. 


"미안합니다. 저의 책임이었는데 저는 작가님 탓을 해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한 상대는 나와 약 1년 동안 같이 작업을 하면서 정말 많이도 부딪혔던 작가였다. 부딪히는 게 싫어서 나는 고상한 척을 하며 메일을 보내기도 하고, 나만의 논리적인 근거를 갖다 대면서 그 사람의 잘못된 점을 유독 깊이 파고들었다. 사이가 좋을 수가 없는 관계였다. 관계가 악화되다 못해 체념의 상태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그저 작업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럴수록 일은 빨리 끝나지 않았다. 이 일의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니 수정사항이 계속 생기고 수정사항이 계속 생기니 일은 빨리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런 상대에게 어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결과물에 있어서 내 책임이었음을 밝혔다. 일을 하던 때에는 그것이 내 책임이라는 것을 몰랐고 작가님의 탓으로만 생각했음을 고백했다. 나는 웹툰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몰랐고 나의 포지션도 제대로 인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했으며 그로 인해 모두를 힘들게 했다,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침없이 나의 잘못을 고백했다. 업무에 있어서 책임으로 있지 못했던 나의 존재를 상대방에게 고백하는 일은 나를 오히려 가볍게 만들었다. 마음속에 늘 가지고 다녔던 말들을 하나 둘 그렇게 전달했다. 그리고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듣게 됐다. 


"아닙니다. 저 역시 그 작업에 많은 책임을 느낍니다. 대표님이 중간에서 많이 노력해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 많이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도 죄송해요." 


신기한 일이지 않은가? 나는 나의 책임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미안하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런데 상대방 역시 자신의 책임을 이야기하다니... 여기서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는 정말 칼만 안 들었지 메일에 날카로운 칼을 박아놓고 정말 많이 싸웠다. 언제든 누가 한 번만 삐끗해도 그 칼에 찔릴 수 있는 위치에서 약 1년을 일했다. 그런데 어제 우리의 통화는 그렇지 않았다. 서로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먼저 나의 빈 손을 보여줬다. 그러자 상대방도 자신의 빈 손을 보여줬다. 그제야 우리는 악수를 할 수 있었다. 긴긴 시간 동안 서로 칼을 쥐고 살아오던 우리의 무거운 손을 가볍게 만들자 우리는 비로소 악수를 하며 서로 웃을 수 있었다. 


"저도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대표님을 만나 뵙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 해야 되는 일들이 많다 보니 시간을 내지 못했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작가님 바쁘신데 제가 계속 미팅 일정을 잡자고 이야기해서 미안해요. 이렇게 진작 전화로 먼저 이야기할 걸 그랬어요." 


서로의 빈손을 확인한 이후의 대화는 더욱 부드러웠다. 나의 손을 잡아주어서 고마웠다. 그리고 나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나에게 연락하라고 이야기했다. 지금 당장은 각자의 위치에서 일을 하겠지만 우리의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그 가능성을 나는 어제 보았다.


"작가님 바쁜 일 끝나면 그때 편하게 봐요."
"네 좋아요." 


우리가 다시 볼 때는 더 편한 표정으로 서로 더 많은 것들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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