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를 그만두고 나자, 요일과 시간 감각이 제일 먼저 사라졌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자, 요일과 시간 감각이 제일 먼저 사라졌다. 나의 마지막 출근일은 금요일이었고, 그다음부터 나는 늘 토요일에 사는 사람 같았다. 오늘도 토요일, 내일도 토요일. 습관적으로 일어나자마자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날짜와 요일을 확인했다. 시간은 멈출 줄을 몰랐다. 누군가의 초심처럼, 시간은 착실했다.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게 될 삶을 정리하고 싶었으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토요일에 사는 사람이었고, 나에게는 월요일이 올까 봐 불안한 일요일도, 기어코 오고야 마는 월요일도, 조금 익숙해지는 화요일도, 금요일을 기다리게 되는 수요일도, 야근을 하게 되는 목요일도, 주말을 생각하며 들뜬 금요일도 없었다. 오로지 평온하고 평온한 토요일만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일요일이 오지 않고, 월요일이 오지 않는 멈춰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 평온하되 멈춰있는 역설적인 토요일에 갇혀 버리게 된 것이다.
나는 4년 6개월 동안 나의 책상을 지켜왔다. 인턴으로 회사 생활을 시작한 나는, 회사에 출근하면 내가 앉을 수 있는 책상이 있단 사실이 정말 기뻤다. 단지 책상일 뿐이었는데, 당시엔 책상이 나의 세계가 되어주었다. 회사에서 처음 맡았던 업무는 회사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다른 회사의 홈페이지를 조사하고, 어떻게 레이아웃을 짤 것인지 구상하며, 어떤 내용을 집어넣을 것인지 검토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주변 동료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대표에게 보고하고, 자리로 돌아와 수정했다. 대학교를 갓 졸업한 나로서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내 책상이 좋았다. 내가 사회에 나와 앉을 곳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작년 연말에 나의 세계가 되어주었던 책상을 정리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여러 번 자리 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인턴 시절에 사용했던 그 책상에서 사직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나의 세계였던 책상은 더 이상 나의 세계와는 무관한 사물이 되었다.
토요일에 갇혀있는 나는, 내 방에 있는 연두색 책상에 앉았다. 연두색 책상은 내가 회사를 다닐 때도 내 곁에서 같이 일해주었다. 눈뜨면 일하고, 눈감으면 잤다. 연두색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컴퓨터는,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불빛을 내며 고객들로부터 들어오는 이메일을 기다리고, 이메일이 들어오면 내게 알려주었다. 해외영업을 하던 나는 불을 끄고 잔 기억이 거의 없었다. 매일 시험을 치는 학생처럼, 불을 끄면 완전히 자버릴까 두려워 불을 항상 켜두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주말에도 종종 불을 켜두고 잠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제일 먼저, 잠을 잘 때 불을 껐다. 연두색 책상도 나와 같이 잠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어둠이 주는 고요함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를 준비하고 나온 퇴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퇴사 과정에서 있었던 수많은 피로감과 긴장이 한 순간에 풀리면서, 며칠 동안 몸살을 앓았다. 아프다고 상사에게 보고하지 않아도 되고, 밀린 일 때문에 걱정하면서 누워있지 않아도 되고, 아픈 것도 서러운데 병가로 휴가를 반납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며 혼자 위안 삼았다.
연두색 책상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앞으로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돈으로 얼마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느냐였다. 모아둔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길게 백수생활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단 판단이 섰다. 몇 달 후에는 이 집도 비워줘야 한다. 대출이자, 관리비, 통신비, 식비, 기타 등등의 비용이 매월 생각보다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토요일에 갇혀서 영영 나올 수 없으리라.
사람인, 잡코리아 등의 채용 사이트에 이력서를 업데이트시켜두었다. 링크드인에는 영문으로 경력사항을 업데이트시켜두었다. 취업이 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력서를 업데이트시켜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마치, 책을 구매한 것만으로도 책을 읽은 것 같은 기분에 심취되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읽지 않은 책은 먼지만 쌓일 뿐이다. 이력서를 업데이트해두었지만, 이력서를 넣지는 않았다. 채용공고를 알림 서비스로 받아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들을 구경만 할 뿐이었다. 일을 그만두고 쉬라고 이야기를 했던 엄마도, 구직활동을 언제부터 할 것인지 궁금해했다. 일단 상반기까지는 쉬겠다고 이야기했다. 하반기에도 변함없이 지금 이대로면, 그때는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말이다. 마치, 누군가 나를 위해 기다려주고 있다는 듯이 나는 엄마를 안심시켰다.
인턴 시절 나의 전부와도 같았던 책상이 사물로 변해가는 것을 목격한 나로서는 사실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 내게 건네주는 세상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내 연두색 책상에서 나의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연두색 책상과 어떤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두색 책상은 늘 내 옆에 있어주었다. 내가 원하면 낮이고 밤이고 늘 나를 위해 있어주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나의 세상이 이력서에 있는지, 다른 곳에 있는지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토요일에 산다.
토요일에 갇혀 산다.
생각해야 했다.
나에겐 다른 요일이 필요하다.
다른 세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