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라는 적
부모님은 한 번도 나에게 '너는 특별한 아이야'라는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마치 무슨 소명처럼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유달리 대표를 맡을 일이 많았고, 내가 원하든 또는 원치 않든 중요한 자리는 늘 나의 것이었다. 마치 이 세상은 이미 나를 위한 자리를 항상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에고
그 누구(무엇) 보다 더 잘해야 하고 보다 더 많아야 하고
또 보다 많이 인정받아야만 하는 것
출처 = 에고라는 적
하지만 스무 살의 어느 날, 나의 에고는 한순간 무너지기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드라마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본격적으로 대학교에 들어가 글을 배우게 되었을 때, 내가 들어가고자 했던 세상의 문턱 앞에서 뒤돌아섰다. 글을 잘 쓰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고, 그들 틈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고, 이제는 더 이상 내게 중요한 자리는 준비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첫 번째 대학교를 그만두었다.
여행을 떠났고, 겨울이었고, 혼자였다. 스무 살에서 스물한 살이 되었고,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이 다가왔다. 입시공부를 다시 하기 시작했고, 면접은 쉽지 않았으며, 아주 어렵게 지방대에 입학했다. 동기들은 나보다 두 살이 어렸고, 글이 아닌 언어로 전공을 바꿨다. 당시 왜 언어를 전공으로 삼았는지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저 영어는 싫었고 새로운 언어로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새로운 언어의 끝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고, 스물두 살에 나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
휴학 없이 공부를 한 끝에 조기졸업을 할 수가 있었고,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새로운 세상에서 내가 배워야 할 것들은 많았고, 나의 에고는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없앤 것이 아니라, 회사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소멸해버린 것이었다. 회사에 적응하는 것은 힘들었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나를 바라보는 일은 서글펐다. 회사라는 시스템 안에서 승진을 했고, 사람들을 만났고, 일을 했다. 그러다 서른 살을 고작 한 달 앞두고 회사를 나왔다. 조각나버린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수습하는 데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여행을 떠났고, 여름이었고, 혼자였다. 스물아홉 살에서 서른 살이 되었고,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이 다가왔다.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고, 오랫동안 쓰지 못했던 글도 틈틈이 쓰기 시작했다. 공모전에 글을 보내봤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러다 1인 출판사를 시작했고,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출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하나하나 배워가며 한 권 한 권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왜 출판사를 시작했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다시 회사로 들어가기는 싫었고, 출판사를 하면 내 책을 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 내가 가진 자본금으로 도전할 수 있는 분야 중에 하나가 바로 출판이었기 때문이었다. 큰 이유도 작은 이유도 없이 시작했고, 서른 살에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
처음엔 자신을 알리자고 생각했다. 문은지라는 사람이 세상에 나왔으니 여러분 관심 가지고 지켜봐 주세요~ 나는 온몸으로 외치기 시작했고, 그때만큼 SNS를 많이 하던 때도 없었다. 정말 열심히 말하고, 또 말하고,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받고, 마치 대단한 계시를 받은 양 나는 그렇게 무엇이든 도전했고, 이뤄냈고, 또 도전했다. 마치 어떤 일이든 주어지기만 한다면 해낼 수 있다는 듯이 자신감에 넘쳤고, 회사를 다니면서 조각나버렸던 에고는 활활 타올라 나를 있는 힘껏 위로 올려다 주었다.
인터뷰 제의가 들어올 때는 더없이 기뻤다.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날도 좋았다. 무언가 이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잘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중요한 자리가 만들어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갔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얼마나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나는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사업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났다. 마치 동물원에서 묘기를 부리는 돌고래처럼 나는 있는 힘껏 링 안으로 들어가며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공연은 끝났고, 사람들은 떠났다. 나는 힘차게 뛰어오르지 않아도 되었지만, 텅 빈 객석을 바라보는 일은 내게 힘겨운 일이었다. 나의 에고는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고, 슬럼프가 찾아왔다.
하고 있던 모든 일을 중단시켰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SNS를 줄여가기 시작했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많은 부분들을 공개하지 않기 시작했다.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일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주의하기 시작했고, 내가 하는 일에는 더 많은 시간과 전문성이 필요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고, 나는 꽤 오랫동안 멈춰서 '나'라는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중요한 자리가 언제든 나를 위해 준비되어있지 않음을,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결과는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그러니까 나는 아직 멀었음을, 나는 봄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한참이나 주저앉아있었다.
01. 인생의 전환점마다 찾아온 에고 1 : https://brunch.co.kr/@dndb21/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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