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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사이다 Mar 08. 2024

[분리] 죽음을 인식하다

하던 행동을 멈추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가 이전에 행동하던 대로 행동하고, 이전에 생각하던 대로 생각하고, 이전에 살던 대로 사는 것은 내일이 계속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순간에 내일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 인생에 변화를 주는 이유는 삶의 유한성이 우리에게 변화를 만들어낼 만한 동기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변화든지 그냥 일어나는 변화는 없다.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를 유지하는 것은 에너지가 들어간다. 살던 대로 살아가는 것이 관성이고 거기에는 에너지가 들어가지 않는다. 굳이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동기가 필요하다. 그 동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동기는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일까?


과거에는 동기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동기부여”라는 말이 얼마나 자주 사용되었는지 알지 않은가. 하지만 요즘 들어서 동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외부에서 주어진 동기는 일시적이고 삶에 끼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다. 그와 반대로 내부에서부터 생겨난 동기는 지속적이며 삶에 끼치는 영향의 범위가 훨씬 넓다. 수업시간에 지식을 배웠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동기가 되지는 않는다. 내부에서부터 동기가 생겨나려면 지식이 내재화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전부터 알았던 사실이 어느 순간 깊은 깨달음으로 이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가족의 소중함을 갑작스레 인식하게 되는 경우처럼 말이다.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하나의 지식으로서 우리의 외부에 존재해 왔다. 삶이 지속된다는 개념은 우리에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의심조차 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말이다.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지만, 눈앞에 놓인 여러 과제와 책임이 우리의 생각을 방해한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깨닫게 방해하는 것은 불가능성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사회는 우리를 꿈꾸게 하고 더 많은 가능한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고등학교를 들어가면 대학교 입학에 대한 꿈을, 대학교를 입학하면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미래를, 회사에 취업하면 결혼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정말로 모든 것이 멈출 때까지 우리는 이 과정을 반복한다. 어떠한 가능성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언젠가 내일이 없을 것이라는 단순한 진실을 말이다. 이 진실을 깨닫는다면 우리 내부에서부터 삶을 변화시키는 동기가 생겨날 수 있다.


브라질에서 완화치료라는 분야를 알리고 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곁에서 치료를 했던 아나 아란치스는 [죽음이 물었다]에서 인생의 큰 장벽으로서의 죽음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끌어주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어떤 길을 택하든 그 길의 끝에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이다. 어떤 길이든 같은 곳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좋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결국 죽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최종 결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 아나 아란치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지만 눈앞에 있는 장벽은 보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장벽을 발견하고 인식하면 우울감에 빠지거나 삶을 지속할 이유를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까? 죽음을 명확히 인식한 사람들은 다르게 이야기한다. 바로 그 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길로 가도록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삶을 변화시킬 동기를 우리 안에서 생겨나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믿고 행동하고 살아왔던 삶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삶은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된다. 삶이 1억 년 동안 이어진다면 오늘 달라져야 할 이유는 없다. 만약 삶이 1주일 뒤에 끝난다면 오늘 달라져야만 하지 않을까?


삶을 다채롭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죽음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본 경험이 있는가? 장담하건대, 그 대화는 쉽지 않을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냉소적인 사람으로 비치거나 너무 철학적인 주제라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죽음을 이야기하면 당신의 주변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다른 자리로 옮길 것이다. 사람들은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힘들 때는 책을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책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 20대 중반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가지 않고 살고 있을 때,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 삶에 대한 고민은 해답이 없어 보였는데 그 와중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죽음을 알리는 의사인 아툴 가완디는 현대 의학이 얼마나 죽음에 관심이 없는지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삶에 대한 고민은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솔직히 나는 이 주제가 편하지 않다. 죽음을 생각하면 두렵다. 나의 죽음도 무섭지만, 내 주변의 사람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더욱더 무섭고 슬프다. 이렇게 말하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던 시간이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만을 일으켰던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나에게 생각의 자유를 선물했다. 죽음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볼 때 기존에 알았던 여러 원칙이 파괴되었다. 죽음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삶의 우선순위는 더 이상 합리적이거나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삶의 우선순위는 '내일은 있다'라는 기본 가정 위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이 있어야 투자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내일이 있어야 더 좋은 직장을 가기 위해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공부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이렇듯 내가 하는 많은 일과 선택은 결국 내일을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답해보기 위해서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아툴 가완디에 따르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하는지가 달라진다고 한다. 사람은 앞으로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한다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데 선택한다. 하지만 시간의 유한성을 인지하게 되면 삶의 우선순위가 변해서 지금, 현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고 한다. 앞으로 만나게 될 모르는 누군가가 아니라 지금 내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과 시간을 보내려고 하고 일상적인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고자 한다. 이 사실은 하나의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다. 어떻게 살 것인지는 결국 삶의 유한성을 인지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죽음을 인지하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은 이전과는 다르게 삶을 생각하게 된다.


죽음을 인지하게 되면 "해체의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완화치료사인 아나 아란치스는 ‘죽어가는 사람은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가족적, 영적 가면을 모두 벗은 벌거숭이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죽음의 과정은 일종의 해체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해체의 과정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는 나로서 살았는가?’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유한성에 대한 고통을 느끼며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알게 된다고 한다.


이전까지는 더 멋진 나, 더 능력 있는 나, 더 아름다운 나에 관심을 가지고 나를 만들어가는데 큰 관심과 노력을 쏟아왔다. 지금도 종종 그렇게 살아간다. 나를 특정한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감각은 조금씩 둔해졌다.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나의 진정한 자아와 멀어진다. 사회적 성공은 우리의 관심을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서 있으나마나 한 것으로 옮겨버린다. 사회적 성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은 집, 차, 직위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진정한 자아와 거리가 멀다. 사회적 성공은 우리를 취하게 만들어서 둔감하게 만든다. 나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순수함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삶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명쾌함을 뺏어간다.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해체의 과정을 경험하다 보면 우리는 멈추게 된다. 멈추고 나를 겹겹이 쌓았던 포장을 하나씩 풀어내게 된다. 물건을 팔 때는 포장이 중요하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물건을 사는 이유는 포장만을 위해서는 아니지 않은가?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부분을 포장하는 것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포장 그 자체가 포장을 하고 있는 대상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포장을 풀어헤치는 과정을 통해 이 사실을 경험한다. 마찬가지로 나의 해체를 통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아가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


해체라고는 했지만 어떤 거창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말한다. 나의 자아가 투영된 대상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나라는 자아를 인식해 보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소유하려고 노력하고 또는 이미 소유한 대상이 만약에 없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인식할까?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거나 선망하는 대상 혹은 싫어하거나 부족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휘둘리는 이유는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해체의 과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죽음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삶의 중심을 찾기 위해서 세상과의 분리가 필요하고, 세상과 분리하기 위해서는 행동과 습관을 멈출 필요가 있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드디어 멈출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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