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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사이다 Mar 22. 2024

카오스를 견뎌라

재작년 회사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달리기만 했던 삶에서 숨 고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프랑스의 남쪽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니스 근처에 까시스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는 깔랑끄라는 길쭉하게 형성된 절벽과 같은 산맥이 있고 그 사이로 아름다운 해변이 있다. 깔랑끄에서 바라보던 해변은 참 평온했다. 사람들은 여유로웠고, 물을 맑고 에메랄드 빛으로 빛났다. 아름다운 해변이라는 말이 바로 이곳을 말하는 거구나하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곳이었다. 깔랑끄에 10년 뒤에 간다고 해도 그 해변은 여전히 동일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짧은 생을 사는 인간과는 다르게 자연은 아주 느린 시간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 기준에서는 자연은 변하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자연을 보면서 느끼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은 나의 내부에 숨어있던 여러 선한 마음들을 불러일으킨다. 어두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걱정하던 많은 일들의 무게를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한다. 자연의 웅장함에 비해 나는 너무나 작고, 자연의 시간에 비해 나는 찰나의 순간동안만 산다는 사실이 알 수 없는 형태로 평온함을 준다.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을 마주하고자 하는 욕구는 그런 평온함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일까.


반대로 매섭게 부는 바람이나 태풍을 맞이하거나, 아주 큰 파도를 볼 때면 나의 먼 조상이 느꼈을 두려움이 마음속 저 밑에서부터 올라온다. 여기서 삶이 끝날 수도 있겠다는 근원적인 두려움이 나의 감정을 지배한다. 자연 속에서 힘없이 살아왔던 시기동안 수많은 조상들이 느꼈을 감정이리라. 지금 시대에 자연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이 많은 것은 그만큼 사람이 자연의 무서움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은 모든 두려움의 1차적 두려움으로서 사람에게 자리 잡아 왔지만 이제는 긴 동면에 들어간 것처럼 느끼기 어려운 두려움이다.


자연을 보면 어떠한 대상이 평온을 주면서 두려움도 줄 수 있는 듯하다. 평온함과 두려움, 따듯함과 차가움,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의 양면성은 자연을 넘어서서 나의 삶 전반에서 종종 보인다.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양면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평온한 것과 두려운 것은 다른 것이고, 평온할 때는 평온하기만을 바라고 두려울 때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같은 자연에서 평온함과 두려움 모두 생겨났듯이, 사실 하나인데 둘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원래 하나라면 왜 나는 이것을 두 개로 인식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나의 대상이 두 개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


그만큼 감정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카오스라는 개념은 우주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우주는 조화롭게 움직인다. 자신만의 법칙을 고수하며 아주 느리게, 하지만 절대 옆길로 새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인 것을 두 개라고 여기고, 이런 감정에서 저런 감정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누구도 방향키를 잡고 있지 않고 어느 고단한 회사원이 피는 담배 연기처럼 서로 얽히고 뻗어나가다가 합쳐진다. 감정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의 본성은 카오스일지도 모르겠다. 우주에서 유일하게 법칙과 예측을 벗어나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우주의 법칙이라는 경찰의 손으로부터 교묘히 빠져나온 사람은 한 구석에서 조용히 혼란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하루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많은 사람과의 관계도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혼란을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도 카오스가 나를 죽이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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