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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혜진 작가 Feb 03. 2022

24시간이 즐거운 아이

큰 아이는 이제 7살이 되었다.  

"세상이 그렇게 즐겁니?" 

이 아이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24시간 웃고 집중하고 떠들고... 아이를 보고 있으면 그저 즐겁다.



친정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자란 첫 손녀. 매주말 친정을 가고 있는데 7년 전과 지금 한결같다. 매주 봐도 또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금요일이면 외할머니는 장을 본다. 그날 곳간은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채워져 주방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기념일만 되면 뭘 사주지 못해서 안달인 외할아버지. 7살인 지금까지도 아이를 업어주고 안아주신다. 나와 이야기할 때와 손녀와 대화할 때 목소리 톤과 얼굴 표정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의 유일한 행복은 손자 손녀와 노는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손자 손녀가 각 1명씩 있지만 첫 정이라는 게 참 무섭다. 둘째보다 첫째가 사랑을 듬뿍 받았다. 온전히 혼자 관심을 받는 시간이 2년 있었기에 아이를 엄마 아빠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까지 흡수했다. 사랑을 받아본 아이가 베풀 줄 안다고 했듯 아이는 24시간 찡그리는 표정 하나 없이 평화롭다. 평온하고 불만조차 없다. 우는 일도 짜증 내는 일도.. 그저 아이에게는 즐거운 일만 가득하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길, 아이 친구 엄마가 말을 건넨다. 

"아이가 늘 웃고 있어요, 매일이 즐겁나 봐요"

내가 봐도 그런 아이다.

부러울 만큼.





"엄마 나도 요리하고 싶어. 이거 잘라볼래"



아이에게 행동의 제약을 주지 않는 편이지만, 주방에서만큼은 나도 모르게 안된다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위험한 것들이 너무 많기에 넓게 허용해주려고 해도 방어의 말부터 튀어나온다. 조금만 더 크면.. 조금만 더 크면 그렇게 미루다가 어느새 7살이 되면이라고 약속을 해두었다. 이제는 조심해가며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슬쩍 나의 마음도 돌아선다. 어른들의 칼을 쉽사리 쥐어줄 수 없기에 아이용 칼이 있는지 검색을 해봤다. 



"엄마가 찾아봤는데 어린이용 칼이 있어. 생일에 그걸 사주고 싶은데 어때?"

"좋아 좋아. 나는 요리사가 되고 싶고 엄마 음식 하는 것도 돕고 싶어. 내 칼 사줘"



장난감 칼과 어른 칼 그 사이쯤 되는 어린이용 칼이 있었다. 그 칼도 조심해서 써야 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내가 지금 쓰는 것보다는 적당할 거라고 생각한다. 곧 아이의 생일이라 핑크색 어린이용 칼과 어린이용 요리책을 주문했다. 택배로 도착한 선물을 혼자 살펴보는데 아이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 나도 씩 웃음이 난다. 엄마 사랑한다며 부둥켜안을 테고 그날 당장 요리 하나를 해보겠다며 냉장고를 뒤지겠지..



요즘 아이는 엄마 아빠 커피를 타주는 것에서 성취감과 행복을 느끼고 있다. 뜨거운 물을 혼자 다뤄야 한다는 점 때문에 미뤄뒀었는데 생각보다 조심히 따르는 모습을 보고 아이의 역할로 맡겨버렸다. 뒤에서 어떻게 하는지 바라보고 있으면 언제 저렇게 컸나 싶다. 칭찬받고 싶은 마음과 내가 할 줄 아는 일이 늘어나는 기쁨까지 많은 마음을 담고 있는 행동일 것이다. 벌써 딸이 타주는 커피를 마셔보다니. 남편과 나는 식탁에 앉아서 서로 눈으로 웃어본다.




아이의 행동에 제약을 주지 않는다고 시부모님은 못마땅해하셨다. 아니 지금도 우리가 잘못하는 거라고 생각하신다. 버릇 나빠진다고- 티를 덜 내실뿐 여전히 우리는 아이를 너무 야단치지 않고 오냐오냐 키우는 그런 부모라고 여기신다. 선이 넓을 뿐 우리도 아닌 건 아니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엄마 아빠인데, 차이가 너무 크다 보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넓은 울타리 안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 사실 큰 육아 철학이 있다기보다 하나하나 간섭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다. 수시로 청소를 하는 엄마도 아니고, 정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다. 어질러진 집 사이 빈 곳을 디디고 지나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성격이라 아이를 놓아주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저 아이라고 해서 무조건 많은 제약을 주어야 하는지, 조금 높은 곳에서 뛰어보는 게 뭐 그렇게 막아야 하는 일일까 생각한다. 그저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해주어야 하지만, 해보고 싶은 아이와 위험하다는 단호함이 늘 맞서는 모습은 내가 원하는 육아가 아니다. 아이도 자신의 선택권을 가져야 하고 그 결과를 맛봐야 한다.



다치는 건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아이를 막고 조심히 키운다고 해서 늘 건강하게 크는 건 아니듯 조금 위험해 보이는 것을 하게 둔다고 해서 무조건 다치는 것도 아니다. 생각하기 나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주느냐에 따라 나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 힘으로 아이는 더 잘하고 싶고 나는 잘 해내리라 그런 믿는 마음이 생긴다. 나는 이제야 조금씩 느끼는 감정을 아이는 어릴 때부터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 시간은 무엇으로도 살 수도 바꿀 수도 없다. 나는 그것들을 아이와 함께 쌓고 있다.



3일 후 아이의 생일에 아마도 아이가 만들어준 간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이 전용 칼과 요리책과 함께 말이다. 점점 하고 싶은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많아지는 아이. 조바심 내지 않고 미리 걱정하지 않고 지켜봐 주는 엄마, 그런 엄마로 있어주려 한다. 그것이 나의 성취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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