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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Jul 26. 2018

공대생의 국제기구 인턴십 도전기 4

남미의 자유로운 사내 문화

인턴이긴 하지만 첫 사회생활을 해외에서 하고 있다. 한국의 기업 문화를 경험한 적이 없어 정확한 비교는 못해도 이곳 사내 문화의 독특한 점들을 써보고자 한다.


자유로운 근무 시간

6월 25일, 회사 인터넷이 연결됐다, 끊겼다를 반복했다. 이날 오후 1시에는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의 경기가 있었다. 나와 같이 사무실을 쓰는 다비드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이 경기를 놓칠 수 없는데.."

12시경 인터넷이 복구됐다. 평소보다 속도는 느렸다. 월드컵 중계는 계속 렉이 걸렸다. 12시 50분쯤 나는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다비드도 길을 나섰다. 아르헨티나의 경기를 꼭 봐야 해서 나머지 근무는 집에서 하겠다는 이야기다.


이 기관의 기본 업무 시간은 월~목 오전 8시 - 오후 4시 30분, 금요일은 오후 2시까지다. 다만 8시에 맞춰 오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이 8시에서 8시 반 사이에 출근한다. 퇴근은 그날 할 일을 마치면 집에 가는데 보통 5시면 회사가 텅텅 빈다. 늦잠을 자거나 차가 막혀 30분쯤 왔다 해서 혼날 일은 없다. 다비드는 9시 반에 출근해서 7시쯤 퇴근한다. 저녁에 업무 집중이 잘 된다는 이유다.


자유로운 근무 환경

스페인어에는 'Tu'와 'Usted' 두 개의 2인칭이 있다. Tu는 너, Usted는 당신으로 해석된다. 처음 보거나 마트에서 계산할 때는 서로 Usted를 씀으로써 예의를 표시한다. 안면이 있으면 Tu를 쓴다. 다만 처음 본 사람에게 Tu를 쓴다고 해서 문제가 될 정도의 어감은 아니다. 친근함의 표시 정도.

나도 사내 사람들과 'Tu' 인칭으로 대화를 나눈다. (간혹 먼저 'Usted'로 칭해주는 분들에게는 나도 그렇게 한다.) 언어의 영향을 받았는지 직급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1명의 사무총장과 각 부서 국장 말고는 '상사(jefe)'의 개념이 없다. 모두가 동료이다. 덕분에 토론과 의견 교환이 매우 자연스럽다.



복장도 자유롭다. 출근 첫날, 졸업식 때 입은 정장 풀 세트를 입고 왔다. 국장님은 "내일부터는 편한 복장 하고 와. 트레이닝 복만 아니면 돼"라고 했다. 나는 주로 셔츠와 가디건, 면바지 혹은 슬랙스, 운동화를 입고 온다. 셔츠가 지겨우면 그냥 면 티에 바람막이 하나 입고 오기도 한다. 가끔 직원들끼리 축구를 하는 금요일에는 모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출근한다.

프레젠테이션이나 세미나에 간다면 차려입겠지만, 아직까지 그런 기회는 없었다. 기껏 가져온 수트는 장롱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다.


얼마 전 금요일에는 우루과이-프랑스, 브라질-벨기에의 8강전이 있었다. 남미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몇몇 직원들이 세미나룸에 모여 프로젝트를 띄우고 관람했다. 나는 딱히 업무가 많지 않았던 참에 다비드의 손에 이끌려 갔다. 업무가 많은 사람들은 노트북을 갖고 와서 해설을 들으며 일했다. 우루과이도 브라질도 떨어졌지만 같이 먹은 피자는 꿀맛이었다.

금요일 일과를 축구 관람으로 대체한 꾸-울.

자유로운 복지

퇴근이 빠른 만큼 점심시간은 30분으로 짧다. 공식적으로 정해진 시간은 없다. 본인이 원하는 시간에 먹고 오면 된다. 차가 있는 몇몇 직원들은 쇼핑몰에 가서 사 먹는다. 나머지는 주로 도시락을 싸와 사내 카페테리아에서 먹는다. 배가 고프면 12시 전에 먹기도 한다. 2시가 넘어서야 먹는 사람도 있다. 나처럼 밥 먹는 속도가 느리면 30분을 넘길 때도 있다. 간혹 40분, 50분을 넘겨 먹는 사람도 있는데 아무도 터치하지 않는다. 오래 쉰 만큼 나머지 시간에 더 집중해서 일하면 된다.


휴가도 자유롭다. 6개월 파견 오는 인턴들은 한 번에 몰아서 2주의 휴가를 낸다. (나도 다음 주에 칠레, 아르헨티나로 2주 동안 떠난다. 흐흐.) 현지 직원들 또한 여행을 위해 1-2주 정도의 휴가를 쓴다. 자기 업무만 잘 마쳐 놓은 상태라면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2주 전에는 먹은 게 채 해서 새벽부터 아팠다. 겨우 출근은 했지만 일이 도저히 잡히지 않아 잠시 카페테리아의 소파에 누워 있었다. 집에 가고 싶었지만 전날도 대사님과의 약속이 있어 조퇴를 했기에 눈치가 보였다. 마침 지나가던 국장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놀라서 일어나 인사를 했는데 국장님은 어디 아프냐며, 누워있으라고 했다. 사정을 얘기했더니 너무 쿨하게 "일보다 건강이 우선이지. 힘들면 조퇴 해."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은 1. 남의 눈치 보지 않는 문화 2. 일보다 건강, 가정을 우선시하는 문화 3. 여유로운 사회 분위기 덕분에 가능하다. 간혹 경제 지표만으로 남미 사람들을 '게으르다'며 일반화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글쎄. 이들 입장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유난 떤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에콰도르에 이민 온 지 20년이 다돼가는 한국 분들들이 한국에 잠시 다녀온 뒤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정' 많은 나라라는 말은 다 옛말이더라. 너무 매정해. 말을 못 걸겠더라고. 그래도 여기(에콰도르)는 아직까지 사람 사는 곳 같잖아."



인턴이라는 애매한 신분이기에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 사내 문화를 자유롭다고 느꼈을 것이다. 실제 현지인들처럼 일을 하면 다를 수도 있다. 어쨌든 첫 사회생활을 이토록 프리 하게 하다니! 워라벨이 붕괴가 되기도 한다. '워'는 없고 '라'만 남아 한껏 도태되는 느낌.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 올해 신입으로 입사한 친구가 일부러 밤 12시까지 회사에 남아 있어서 힘들다는 말을 하자, 2년 차 친구들이 말했다.

"열심히 할 필요 없어. 너 건강만 나빠져. 어차피 일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 사내 정치 잘하는 인간들이 승진도 빨라."

쓸데없는 걱정이 든다. 눈치와 센스는 0점, 라인도 낯간지러워 잘 못 타는 내가 한국 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너무 안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앞으로 불어닥칠 돌풍을 피해 잠시 태풍의 눈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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