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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Mar 25. 2018

금요일은 두시에 퇴근합니다

금요일은 모든 직원이 2시에 퇴근한다. 1시 쯤 하늘이 흐려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2시 10분 조금 넘었을 뿐인데 대부분의 직원들은 이미 퇴근했고 회사는 조용했다. 문을 열고 이어폰을 꽂고 우산을 폈다. 플레이리스트의 임의재생 버튼을 눌렀다. 왠지 이적의 Rain을 제일 먼저 듣고 싶었는데 아이폰이 내 마음을 알았는지 Rain을 재생시켜줬다.


주말 반찬을 사기 위해 잠시 시장에 들렀다. 시장 주변으로는 배수로가 없어서 이미 물 웅덩이가 깊게 생겨 있었다. 점프해서 가기에는 너무 길었다. 웅덩이를 밟는 순간 양말이며 신발이 다 젖을것이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찝찝할 것이다. 잠시 처마 밑으로 몸을 피해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었다. 조금 들뜬 마음으로 웅덩이를 밟았다. 시장 건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원래는 그냥 쳐다보기만 했는데 오늘은 다들 웃는다. 아시아인인것도 신기한데 맨발 차림으로 시장에 들어왔으니 그게 그렇게 웃긴가보다.


그 시선을 한창 즐기며 정육점 코너에 갔다. 아주머니에게 비가 많이 온다며 나는 맨발 차림으로 여기 왔다고 발을 슬쩍 들어보이며 자랑했다. 발을 보이며 껄껄 웃자니 아주머니도 신나서 웃으신다. 돼지고기는 선홍빛, 소고기는 붉은빛이 돌아야 좋다고 했다. 이 시장 고기는 선홍빛도 붉은빛도 아니다. 짙은 갈색 빛이 도는 고기인데다 다른 시장이랑 비교해서 가격도 그닥 싸지 않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신나게 웃었으면 그만인 것을.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합쳐 11불 조금 넘게 사서 시장을 나왔다.


여전히 맨발 차림으로 나오니 15분에 한 대 오는 버스가 막 차고에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나는 첨벙 첨벙 물살을 가르며 버스를 향해 뛰어갔다. 차에 탔더니 기사님이 무어라 말을 했다. 나는 잘 못알아듣고는 이 버스가 끼센뜨로 가는 버스 아니냐고 되묻기만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안내원이 자신의 귀와 창밖을 동시에 가리키며 이어폰을 떨어뜨렸다고 말해줬다. 남미 오기 전날에 헌혈하고 받은 불루투스 이어폰이었다. 덕분에 이어폰을 줍고는 뒷자리에 앉았다. 종점이어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잠시 뒤 버스는 출발했다. 나는 버스가 15분 쯤 달리고 내 발이 충분히 말랐을 때 다시 양말과 신발을 신었다.


양말 하나는 비를 맞아 촉촉하게 젖어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까 직원들과 축구할 때 신은 양말이라 냄새가 살짝 났다. 조금이나마 나은 축구 양말을 신었다. 음악을 듣다 이내 잠이 든다. 빗방울이 맺혀 흐르는 버스 창가에 기대어 나도 모르게. 잠시 뒤 창밖에서 누군가 머리를 탕 쳤다. 이 충격에 깨어보니 밖에서 현지인 서너명이 나를 보며 깔깔 웃고 있다. 멀어지는 이들을 뒤로 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경멸의 눈빛으로 째려보는 것 밖에 없다.


처음에는 “버스에서 잠들면 도둑 들 위험이 있으니 일어나세요”를 알려주려 한건가 싶어 고마운 마음이 들었으나 그들이 깔깔 웃는 모습, 게다가 내 뒤에 앉아있던 현지인들도 그 광경을 보며 같이 깔깔 웃는 모습에 마음이 상한다. 인종 차별인가.


지난 주말에 바뇨스의 한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초,중학생 너덧명이 옆 테이블에 앉았다. 백인 여행자들과 나로 이루어진 우리 테이블을 신기한 눈으로 한참 바라보던 한 아이가 날 가리키며 ‘치노’ 했다. 남미 사람들이 아시아인들을 치노(중국인)라 부르는거는 하루이틀이 아니니 그냥 다정하게 나 중국인 아니라고 웃으며 말해줬다. 그러고는 다시 밥을 먹으려던 찰나, 또 다른 아이가 ‘치노는 이걸로 알아본다’ 라며 눈을 찢는 모션을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정색을 하며 아이들을 바라봤다. 짧은 스페인어로 그짓거리 하지 말라며 경고를 했다. 아이들은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며 조금 당황한채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같이 여행온 유럽 친구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는 괜찮냐며 위로 해 주었다. 아이들인데 뭐. 난 신경 안써. 쿨하게 말했다. 모르겠다. 사실은 굉장히 치가 떨리며 신경 쓰인다.


다시 버스 안으로 돌아와서, 밀려있던 카카오톡 메시지를 읽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비가 내린다. 대기업에 취업한 동기들은 어떤 차를 사야할지 고민하고 있다. 회사 밥이 맛있다, 그런데 상사의 눈치 보며 퇴근해야 한다, 주말에도 나와서 일을 했다, 군대 문화 때문에 알아서 눈치껏 일을 배워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었다. 위로해 주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고작 한다는 얘기가 여기는 4시 반 칼퇴근 이라는 자랑뿐이었다. 나는 참 못된 친구다.


사실은 한국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직장에서 말도 잘 안 통하고, 적응이 안 돼 무척이나 외롭다는 이런 고충을 털어놓고 싶었으나 묵혀두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 때 꿈을 좇아 남미로 다시 간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나보다. 언제쯤 이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언제쯤 자랑도 위로도 아닌 따뜻한 공감을 해줄 수 있을까. 아니 사실은 모두 마음 한켠에 외로움이 있는데 이를 적절히 숨길 줄 아는 게 진짜 어른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주말에도 출근하는 친구가 있어 차마 이 말은 못했지만 어쨌든 금요일 2시 퇴근은 행복하다. 버스에서 당한 기분 나쁜 인종 차별을 뒤로 하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맨 뒷자석에 두 부부가 앉아있는데 수화로 대화한다. 어느쪽이 말을 못하는 건지는 모르겠고 그게 중요한 것 같지도 않다. 다만 그 둘은 세상 행복을 다 가진 듯 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과 나누는 둘만의 대화, 둘만의 시간.


그런 것을 위해서라도 금요일 2시 퇴근은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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