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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Nov 15. 2018

무한 줄서기의 나라, 울띠모?

쿠바 한 달 살기 1.

헤밍웨이와 체게바라의 나라!로 쿠바를 정의하는 건 우리나라를 비티에스의 나라로만 여기는 것과 똑같다. 쿠바를 먹여 살리는 근간인 관광업을 거둬내고 알맹이만 뽑아보자. 내 생각에 쿠바는 줄서기로 시작해서 줄서기로 끝난다.


오랜 사회주의 체재 덕분일까. 쿠바 사람들은 줄 서는 데 익숙하다. 시장에서는 봉투를 받기 위해 아침 일찍 길게 늘어선 줄을 볼 수 있다. 관공서에서도 번호표 따위 없다. 무조건 줄서기다. 기차표를 예매할 때도 긴 줄을 선다. 일처리가 상상 이상으로 느리기 때문에 기다림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Plaza de la revolucion, Habana, Cuba

나름의 줄서기 지혜를 터득한 쿠바인들은 여기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으니, 바로 "Último(울띠모)?"다. 우리말로 치면 "내 자리 좀 맡아줘"와 비슷한데 그거보단 복잡하다. 수십 명이 서로에게 "내 자리좀 맡아줘" 하는 느낌. 덕분에 울띠모를 처음 접해보는 외국인은 살짝 낯설다. 헌데 적응하는 순간 가장 아날로그 적이면서 합리적인 이 방식에 놀란다.


울띠모는 스페인어로 '마지막' 이란 뜻이다. 어디든 줄을 설 때 맨 뒤에 가서 붙으면 그만.. 이 아니다. 반드시 "끼엔 에스 울띠모?"(마지막 사람 누구예요?)라고 묻는다. 손을 드는 사람은 맨 뒤에 있을 수도, 대열 밖에 서서 더위를 식히고 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당신의 순서는 그 사람의 다음이 된다.


잠시 후, 새로운 사람이 와서 외친다. "울띠모?" 이때, 당신이 손을 들어야 한다. 내가 바로 마지막 사람이요. 자, 이제 당신은 줄서기에서 해방이다. 앞사람이 입구에 들어가는 순간을 주시해야겠지만 아무튼 대열을 이탈해 잠시 다른 곳에 다녀와도 괜찮다. (그러다가 들어갈 타이밍을 놓쳐버리면 다시 줄을 서야 한다.)

Trinidad, CUba

울띠모를 하지 않고 그냥 줄을 서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나는 식당에서 "저기요~"도 눈치 보면서 하는 진성 꼬레아노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울띠모?"라고 외치는 게 처음엔 간지러웠다.


어느 날 기차표를 예매하려고 줄 맨 뒤에 붙었다. 울띠모 안 해도 알겠지 뭐, 안일한 마음으로. 사람들은 계속 와서 붙었고 울띠모 물어볼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일단 울띠모를 걸어 놓으면 대열에 나와 그늘 혹은 벤치로 들어가기 때문에 내 뒤에 몇 명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슬슬 쫄려갈 때 누군가 "울띠모?"를 찾는 외침에 슬며시 손을 들었다. 이쯤 서면 괜찮겠지.


그것이 발단이었다. 차례가 가까워오자 사람들의 언성이 높아졌다. 내가 저 치노(중국사람) 보다 먼저 왔다, 저 치노가 울띠모 했고 내가 그다음이다, 당신이 나보다 늦지 않았냐, 이런 말이 오갔다. 울띠모를 안 함으로써 순서가 뒤죽박죽 돼버렸다.


한참의 언쟁 끝에 각자의 자리를 찾은 쿠바노들은 내 위치도 살뜰하게 챙겨줬다. "저 할아버지 다음이 네 차례야." 덕분에 처음 왔던 순서 비슷하게 예매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어딜 가든 줄이 있으면 울띠모를 먼저 걸어 놓는다. 

Trinidad, Cuba

쿠바에 오래 있으면 가장 먼저 정 떨어지는 부분이 바로 기다림이다. 8시에 시작하는 비자 연장 업무를 위해 7시 반부터 줄을 서도 이미 사람들이 꽉 차있다. 지겹도록 느린 관공서의 일처리를 기다리노라면 진이 다 빠진다. 멍 때리는 거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여기 와서 다 망했다.


쿠바인들은 이 긴 기다림 속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할까. 인터넷도 못하는데. 책을 읽는 것도 아닌데. 나는 기다리면서 무엇을 하나. 오늘도 수리 맡긴 전화기를 찾으러 통신사에 갔다. 오픈 1시간 전에 가서 줄을 섰더니 다섯 번째다. 지난번에 개장시간에 맞춰 갔을 땐 두 시간 반 기다렸다. 다행히 오늘은 30분 만에 들어갔다. 수리가 완료된 전화기를 찾고 통신사를 나왔다.

전화기 고치러 쿠바왔수.
울띠모가 누구요? 접니다만.

만약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게 아까워 늘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쿠바에서 한 달 이상 살아보기를 추천한다. 이쯤 되면 "기다리는 시간에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따위 사라지고 어느새 "점심 뭐 먹지. 와우. 쿠바 사람들 참 잘생겼네. 이 동네 참 덥군." 이런 생각들로 한 시간을 흘러 보내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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