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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Apr 29. 2018

여행 중, 부모님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건

지난 토요일 오타발로라는 원주민 마을에 여행을 가는 길이었다. 동행들과 동떨어진 자리를 얻게 되어 옆에 탄 아저씨에게 물었다. 자리 좀 바꿔주실 수 있나요? 아저씨는 수줍게 그러나 단호하게 노,라고 말했다. 나는 이참에 스페인어 연습이나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마침 나와 같은 아침(엠빠나다)을 먹고 있길래 여기서 파는 엠빠나다 너무 비싸지 않냐며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오타발로까지 가는 두 시간 동안 우리는 남미의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방이 한 달에 360불인데 여기 한 달 최저 임금이 380불이라고 했다. 나는 남미가 전 세계에서 불평등이 가장 심한 대륙이라는 이유로 이곳이 끌렸고, 아직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겠지만 불평등 해소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내 꿈을 응원해 주셨다. 가는 내내 창밖에 보이는 호수며, 원예 공장이며, 풍경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루이스의 집은 오타발로에서 30분가량 떨어진 타바쿤카라는 마을에 있다고 했다. 나는 지나가는 말로 한번 초대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반색하며 언제든 오라고 했다. 나도 내친김에 다음 주 토요일에 같이 가보자고 했다.


오늘 루이스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시외버스의 19, 20번 자리에 앉았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멈춰야 시내 구경을 할 수 있을 거라며, 날씨가 맑아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침을 먹었냐고 물었더니 집에 가면 자기 엄마가 요리를 할 거라고 했다. 마침 남북정상회담이 전 세계적인 이슈였던지라 대화 소재가 넓어진 느낌이었다. 루이스는 여러 번이나 내가 북에서 왔는지 남에서 왔는지 헷갈리는 듯했다.


한 시간 반 가량 달렸지만 빗줄기는 더 강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버스에서 내리니 아무것도 없는 도로 한복판이었다. 내가 우산을 필 틈새도 없이 루이스는 앞으로 달려갔다. 나는 우산의 버튼을 누르고 서둘러 루이스를 따라가 우산을 씌워줬다. 길이 좁아지자 루이스는 또다시 속도를 내 달려갔다. 나는 우산을 같이 쓰고 싶었지만 진흙밭 속에서 달리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루이스는 대가족이다. 6남매와 부모님이 한 동네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이 동네는 말 그대로 시골이었다. 집 입구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미동이 없는 소 한 마리가 있었다. 주변은 모두 초록색 숲과 옥수수, 콩 밭으로 차있었다. 루이스의 집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 옆으로 여동생의 집, 누나의 집, 엄마의 집이 있다. 강아지가 나를 향해 짖고 있었다. 루이스는 들어가자마자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서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케추아어로 된 음악이 흘러나왔다.

루이스는 집안 구석구석을 소개해 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오는 거실은 온통 푸른빛으로 칠해져 있었다. 벽에는 딸이 그렸다는 그림 몇 점이 걸려있었다. 그림 속에는 호수 위에 떠있는 집이 있었고 집 앞에는 보트가 있었다. 저기 살면 왔다 갔다 하기 참 불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계단을 두 개 올라가니 벽난로가 있었다. 아저씨는 비가 와서 춥지 않냐며 불을 때겠다고 했다. 나는 옷을 두 겹 입었으니 괜찮다고 했다. 그러자 자기가 춥다며, 주변에 있는 목재를 모아 벽난로에 집어넣고 성냥불을 붙였다. 불이 강하게 피어오르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저씨는 오래된 신문, 아이스크림 나무 막대, 계란판 따위를 집어넣어 불씨를 키웠다. 불이 좀처럼 커지지 않자 “이것도 넣으면 효과가 있다”며 비닐봉지를 집어넣었다. 나는 그 와중에 환경 호르몬이 걱정되어 잠시 고개를 돌렸으나 이내 온기에 항복하고 양 손을 비벼가며 불을 쬐고 있었다.


“아내분은 어디 계세요?”

“주말에도 일을 해.”

“딸은요?”

“대학교에 다니는데 과제가 많나 봐. 주말에 집에 오기 귀찮아하더라고.”

“저도 그랬어요.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과제가 많을 땐 너무 바빠서 못 가겠더라고요.”

“그랬어?”

“그럼 아내는 집에 안 들어와요?”

“아, 내가 말 안 했나? 스페인에서 일하고 있어. 일 년에 한 번 밖에 안와,”

“일 년에 한 번이요? 그거 참 슬프겠어요.”

“그렇지. 슬프지.”

아저씨 또한 주중에는 2시간 거리의 키토에서 일을 한다. 집이 꽤 컸는데 이 큰 집에서 주말을 대부분 홀로 보낸다고 했다.


모닥불이 죽어갈 때마다 루이스는 나무 조각을 집어넣었다. 여러 대화를 하다가도 갑자기 말이 끊기면 서로 한동안 불만 쬐며 앉아있었다. 벽난로 옆에는 창고와 침실이 있었고 침실로 두 문의 위로 각각 딸의 어렸을 때 그림과 부부의 신혼 시절 그림이 걸려 있었다. 턱시도를 입은 남자와 드레스를 입은 원주민 여자. 나는 그 그림이 꽤 마음에 들었다. 보자마자 그림 속 주인공이 루이스 아저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25년 전 그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름살만 없을 뿐이었다.


루이스는 곧 모로쵸 두 잔을 가지고 왔다. 모로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콰도르 음식인데 곡물과 우유를 섞어 가열한 뒤 설탕을 타서 달달하게 먹는 따뜻한 음료다. 따뜻한 모로쵸 덕분인지 화롯불 때문인지 아니면 분위기에 맞게 흘러나오는 케추아 음악 덕분인지 저절로 잠이 쏟아졌다. 모로쵸를 다 마시자 점심으로 삶은 감자와 생치즈를 가지고 왔다. 삶은 감자는 한국에서 먹은 것보다 부드러웠다. 치즈는 딱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냄새와 적절한 짠맛이 섞여있어 감자와의 조화가 완벽했다. 아저씨는 우리가 버린 감자 껍질을 사료와 섞어서 강아지에게 가져다주었다.


밥을 다 먹고서도 한참 난롯불을 쬈다. 천장을 거세게 두드리던 빗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자 이제 슬슬 나가봐도 되겠다며 동네 구경을 시켜주었다. 먼저 간 곳은 셋째 여동생 엘사의 집이었다. 엘사는 전통 원주민 복장을 하고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집이 꽤나 컸는데 1층은 용접실 및 식당으로, 2층은 각자의 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내 팔뚝만 한 조그만 강아지가 밥을 달라며 짖고 있었다. 비를 맞아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는데 몸을 만져주자 좋아하며 더 달라붙었다. 그곳에서 엘사는 커피를 타 주었다. 이 지역에서 나는 콩으로 볶아 직접 내린 커피였는데 향이 강하지 않고 은은해서 좋았다.


아저씨는 나를 까얌베라는 작은 마을로 데려다주었다. 까얌베는 관광지는 아니었다. 도시 내에 눈에 띄는 거라고는 중앙 광장에 서있는 로봇 모양의 동상이 전부였다. 6월이 되면 이 마을에 축제가 열리는데 주변 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특이한 털가죽 복장을 하고서 춤을 춘다고 했다. 동상은 받침대 위로 커다란 지구본이 있었고 그 위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로봇이 올라가 있었다. 이곳이 적도 라인을 지나는 곳이기 때문에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했다.


돌아가기 전에 잠시 시장에 들렀다. 루이스는 여기서 찬쵸가 맛있다며 꼭 먹어보라고 했다. 돼지고기를 장조림처럼 볶아서 감자 또띠아, 모떼(옥수수 비슷한 곡물)와 곁들여 먹는 음식이었다. 나는 해가 지기 전에 키토로 돌아가고 싶었기에 포장을 해달라고 했다. 가방에 넣어놓고 길을 나서려는데 열어보니 이미 국물이 새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래서 내가 먹고 가자고 하지 않았냐며, 그냥 걸어가면서 먹으라고 했다. 뭐 어차피 아무도 신경 안 쓴다고. 그래. 까얌베는 관광지가 아니지만 사실 그래서 좋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원칙이 사람들이 다 가는 곳은 안 가는 것이라 했던가. 딱히 한 것도 없으면서 괜시리 뿌듯해지는 기분이다.


평소에 꼼꼼하지 못하고 덜렁대는 나는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루이스는 어느 것 하나 따지지 않고 마을 이곳저곳을 데려다주었다. 길을 걸으며 밥을 먹다가 코카콜라를 마시고 싶다고 하니 슈퍼에도 같이 가주었다. 딸기가 무척이나 싸서 한 봉지를 샀더니 직접 가방에 넣어주며 꼼꼼하게 챙겨줬다. 행복하긴 한데 조금 낯설었다. 나는 우리 아빠와 단둘이 무언가를 한 적이 극히 드물고, 같이 밥을 먹더라도 서로 몇 마디 나누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루이스가 정말 아빠 같았다. 루이스 아저씨도 나를 아들처럼 생각해서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 걸까.


루이스는 키토로 돌아가는 버스까지 직접 잡아주고는 절대 1.5불 이상 내지 말라고 말했다. 마지막 순간 악수를 하고 웃으며 아저씨를 보냈다. 버스가 떠날 때까지 한참 거기 서 있었던 루이스를 향해 창을 열어 손을 흔들었다. 창문을 닫으니 곧 안데스 산맥의 절경이 펼쳐졌다. 시원하게 흐르는 물줄기, 깎아지른 절벽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루이스 생각을 했다. 그와 보낸 하루를 생각했다. 감사함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굳이 눈물을 뽑아내자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대신에 졸음이 밀려왔다. 언제든 연락해서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여행을 하면서. 혹은 해외에 살면서 마음을 맞는 친구를 만난다는 건 큰 행운이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잘 챙겨주는 부모님 같은 어른을 만난다는 건 더 큰 행운이다.



"아저씨는 남미 다른 나라로 여행 가본 적 있어요?"

"없지. 나는 가난하거든."

"그래도 콜롬비아는 가까워서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지 않아요?"

"글쎄. 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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