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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Nov 22. 2018

쿠바에서 용돈벌이 스페인어 과외를 시작하다

쿠바 한 달 살기. 2

보통 한 달 살기는 일해서 모은 돈을 갖고 떠난다던데. 내가 쿠바에 남게 된 시점에는 인턴으로 모은 돈이 바닥을 보였다. 이래서는 매 끼니 250원짜리 샌드위치만 먹어야 했다. 언젠가 돈이 떨어지면 여행자들에게 스페인어나 가르쳐야지,라고 생각은 했다. 생각만 했지. 실천 방법을 몰랐다.


그때, 쿠바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가 아바나 한 달 살기 제안을 했다.

"너는 여행용 스페인어를 가르쳐라. 나는 사진 많이 찍어서 한국 돌아가면 사진집을 낼 거야."

갑자기 의욕이 붙었다. 호떡 이후로 새 판을 벌릴 때가 온건가. 나는 판단이 느리고 쫄보지만, 인복은 있다. 옆에서 바람만 살살 넣어주면 실행력도 꽤 괜찮게 나온다.

친구가 찍은 말레꼰의 사진. @chastar92

먼저 교재를 만들었다. 퀄리티를 높이려면 저자 직강은 기본이지. 여행 중 말하기가 필요한 상황을 정했고 5개의 챕터가 나왔다. 챕터 1. 나 중국인 아니거든? 챕터 2. 터미널이 어디지? 챕터 3. 추천 메뉴 있어요? 챕터 4. 학생이니 좀 깎아줘요. 챕터 5. 빈 방 있나요.


챕터별로 상황을 짜 대화문을 만들었고, 꼭 쓰는 표현을 넣었다. 필요한 단어도 추가했다. 초급만 공부하면 질문할 때 요긴하게 써먹을 순 있지만 대답은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 그냥 상대방의 손이 왼쪽을 가리키면 왼쪽으로 가면 된다. 그럼에도 공부한 단어를 단 하나라도 알아들었을 때의 희열! 그 맛에 언어를 하지 않던가. 사람들이 그 기쁨을 느끼기 원하는 마음으로 교재를 썼다.

여행객 ㄴㄴ 현지인 ㅇㅇ

다음으로는 전단지를 만들었다. 인터넷 환경이 나쁜 쿠바에서는 모든 것이 아날로그. 당연히 홍보도 아날로그! (사실 디자인이 귀찮았다.) 그럴듯한 글씨체로 꾸몄다. 이력이 많지 않으니 재밌게 써야 했다. 나의 장점은? 여행용 스페인어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


2016년 중남미 배낭여행 두 달.
(그 후, 남미와 사랑에 빠져 스페인어 공부 시작)
2017년 11월 중급 스페인어 자격증 취득.
(남미에 다시 올 날을 고대하다가 드디어)
2018년 중남미 현지 기구 인턴.
(중에 용돈 벌려고 호떡을 팔았으나 말아먹고)
2018년 9월부터 다시 여행 중.


제목은 평범하지만 목적을 명확히 알 수 있는  '알아두면 쓸모 있는 남미 여행 스페인어'로 정했다. 의욕에 불타 홍보를 시작했다. 헌데 쿠바에 1년째 살고 있는 분이 아마 어려울 거라 했다. 비슷한 시도를 한 사람이 있었는데, 여행자들 대부분이 한국인보다 현지인과 배우고 싶어 한다고. 그 말에 더 오기가 생겼다. 교재 퀄리티를 높이자. 더 열심히 준비해보자.

한편으로는, 실패하면 좀 어떤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수강생이 단 한 명으로 끝나더라도 그 한 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홍보를 위해 한국 여행자들이 많이 가는 까사(호스텔)에 들렀다. 취지를 설명하고 학생 1명당 약간의 인센티브를 드리는 조건으로 각 집에 전단지를 붙였다.

수업을 시작한 지 2주째. 지금까지 총학생은 4명이다. 두 명에게 여행 스페인어를 가르쳤다. 그 외, 체계적으로 문법을 원하는 분들은 초중급을 배우고 있다. 이렇게 해도 돈은 별로 안 된다. 하루에 두 시간씩, 두 번 수업이 끝나면 녹초가 되지만 그 돈으로 하루 숙박비 + 점심값은 되려나.


헌데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준비한 콘텐츠를 갖고 돈을 버니 소소하나마 즐거움이 크다는 것이다. 사업을 벌여야 하나. 윽. 사람 상대하는 건 자신 없는데. 그냥 월급 꼬박 받으면서 부업으로 스페인어를 가르쳐 볼까. 아. 퇴근하고도 뭔가를 한다는 거, 만만지 않지.

Habana, Cuba. @chastar92
관광 귀찮아. 자아성찰은 이미 충분해. 뭔가 의미 있는 걸 남기려고 쿠바에 남은 건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즐겁고 싶었어. 그냥 딱, 하고 싶은 일 몇 가지 벌이고 나머지는 흘러가는 대로 마음껏 낭비하고 싶었어. 그게 내가 아바나를 선택한 이유야. 흔들의자에 앉아 밖을 보며 저녁을 보내는 쿠바노들을 닮고 싶어서. 어쩌면 내 DNA 어딘가에도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지 않고 맘껏 게을러도 불안해 않을 수 있는 세포가 있지 않을까. 그걸 찾고 싶어서 쿠바에 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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