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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처럼 다시 남미
by 이원희 Nov 28. 2018

쿠바인처럼 산다는 것

쿠바 한 달 살기. 3

집 전화를 뿌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전화를 받는다는 것이 그만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겁이 났다. 지난번 묵었던 까사에서 손거울을 깨뜨렸는데 20 쿡(=미화 20불)을 물었다. 물자가 부족한 쿠바에서는 전화기 부품 하나 값으로 50 쿡을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정보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쿠바는 그 특유의 불확실성으로 사람을 더 불안하게 한다. 과연 대리점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이며, (집주인도 모른다) 견적은 얼마나 나올지, 몇 번의 방문이 필요할지, 줄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내가 왜 한 달 살기로 쿠바를 선택했나 자괴감이 들어도 때는 이미 늦었다.


고장 난 전화기를 뽑고는 가까운 에떽사(쿠바 유일의 통신회사) 대리점에 갔다. 누가 봐도 외국인인 나 혼자 가면 바가지요금을 쓸 수도 있다.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지. 집에서 일하는 현지인 아주머니께 동행을 부탁했다. 제발, 비용이 50 쿡은 안 넘게 해 주세요!

Habana, Cuba. (@chastar92)

안타깝게도 거기서 수리는 불가능했다. 아바나에서 딱 하나, 23번과 32번 도로가 교차하는 곳에 전화기를 수리해주는 Taller(작업소)가 있는데 그곳으로 가라 했다. 집에서는 합승택시를 한 번 갈아타서 간다.


아바나에는 두 종류의 택시가 있다. 꿀벌 무늬의 공영 택시와 올드카 택시. 올드카 택시에는 주요 관광지를 1시간 25 쿡에 돌아다니는 관광용 올드카가 있고, 그보다 작은 마끼나 택시가 있다. 현지인들은 마끼나 택시를 탄다. 마끼나는 아바나의 주요 도로마다 있는데, 한 도로를 왕복 운행하면서 각 거점마다 사람을 태우고 내리는 합승택시의 형식으로 운영된다.


요금은 인당 10 Moneda nacional (MN), 500원이다. 버스비가 20원 인 것을 감안하면 싼 편은 아니다. 탑승할 때 요금 흥정을 하지 않는다. 목적지를 말하고 기사가 오케이 표시를 하면 타고, 내릴 때 10MN을 지불한다. 

합승택시를 잡는 것부터 일이다. 출퇴근 시간에는 특히 어렵다. 시간을 내서 겨우 수리소에 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울띠모’를 찾는다.


(참고:https://brunch.co.kr/@dnjs9523/111)


내 앞에 족히 스무 명은 돼 보이는데 30분을 기다려도 다음 사람 부를 기미가 없다. 최소 2시간은 기다릴 각이다. 이럴 바에 내일 오픈 30분 전에 와서 줄 서 있는 게 낫겠다. 포기하고 에떽사를 나왔다. 직원에게 오픈 시간을 물었다. 8시 반. 계산이 맞다면 7시 반에는 와야 1등으로 입장할 수 있다. 울띠모(Ultimo, 마지막) 찾을 바에 좀 일찍 와서  쁘리메로(Primero, 맨 처음)가 되는 게 낫지.

다음 날, 늦잠을 잤다. 7시 반에 일어났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쿠바에 남았는데 왜 매일이 빡빡한 건지 모르겠다. 충분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서 더 격렬하게 가만히 있고 싶다. 머리도 감지 않고 택시를 갈아타 에떽사에 도착하니 8시가 조금 넘었다. 아직 닫힌 문 밖으로 대여섯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혀 줄을 안 선 듯 보이지만, 저 안에 보이지 않는 순서가 존재한다. 제일 먼저 울띠모를 찾았다. 꽃무늬 민소매에 세로 줄무늬 레깅스를 입은 할머니였다. 잠시 후 울띠모를 찾는 사람이 왔다. 손을 들어서 내가 마지막임을 알렸다. 슈퍼맨 느낌이 나는 새 파란 티셔츠를 입은 중년 아저씨다. 이런 식으로 옷차림을 통해 앞뒤 사람을 기억한다. 까먹으면 줄이 꼬여서 모두에게 민폐다.


8시 반. 첫 손님이 입장했다. 다섯 명 밖에 없는 줄 알았던 내 앞에는 사실 10명 정도가 울띠모를 걸어놓고 오픈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10시 반이 되어서야 에떽사에 입성했다.


“어떻게 오셨죠?”

“전화기를 떨어뜨렸는데요. 소리가 아주 작아요.”

“그렇군요. 이리 주시겠어요? 어디 보자. 저런. 수화기가 부서졌네요. 이 부분이 뒤집어져 있어서 소리가 작게 들린 것 같군요. 고치는 건 어렵지 않겠어요. 비용은 한.. 2 쿡? 정도 나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금방 되나요?”

“ 오늘이 목요일이네요. 다음 주 수요일 이후에 찾으러 오세요.”

“설마 그때도 줄을 서야 하나요?”

“네. 오늘처럼 똑같이요. 울띠모를 찾으세요.”

Habana, Cuba

여기까지 또 오고 줄 서기는 싫었지만 수리비가 2 쿡 밖에 들지 않아 기뻤다. 집에 오니 11시가 넘었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누웠다. 오늘은 수업도 없는데 뭘 하지. 아! 생각났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 후후. 저녁은 뭘 먹을까. 저녁 메뉴 고르는 것도 일이네. 뭐 먹을지 생각도 아예 안 하고 싶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음. 그래. 심심한데 어제 끓여놓은 물 정수나 해야지.


쿠바 사람들은 물을 어떻게 마실까. 생수를 편의점에서 구입하면 500ml가 약 500원, 1500ml는 800원이다. 한 달 임금이 30-40불 선이라던데, 서민들에게 사 먹는 물은 사치다. 우선은 큰 냄비에 수돗물을 받아  팔팔 끓인다. 하루 정도 식히면 덩어리 진 석회는 가라앉고 가루 석회가 뿌옇게 뜬다. 대형 페트를 준비한다. 그 위에 깔때기를 꽂고, 손수건처럼 생긴 거름망을 올린다. 물을 붓는다. 콸콸콸, 빠른 속도로 물이 내려온다. 잠시 후, 깔때기 위쪽으로 허연 물체가 떠오른다. 석회가 걸러진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이 내려오는 속도는 느려진다.


정수를 하면서 생각한다. 전화기 고치는 것도 귀찮다. 휴. 정말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가능한 걸까. 물 거르는 얘기도 브런치에 써야지. 쿠바 생활을 기록으로 남기고는 싶은데 아무것도 하기 싫다. 한 달 살기에서 꼭 무얼 얻어가야 하나. 과외도 대박 나고 스페인어 실력도 늘고 현지인도 많이 사귀고. 이런 일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바나에 남기로 선택한 건 그냥 말레꼰 해변 노을이 좋아서였고 그 말레꼰을 뛰며 조깅을 하고 싶었고, 빛에 따라 분위기가 바뀌는 올드 아바나 타운이 예뻐서였지. 무언가 남겨야 된다는 생각은 말자. 하루하루 더 집중해서 쿠바인들처럼 생각하고, 쿠바노들처럼 살아보고, 가능하다면 현지인들이 가는 맛집도 개척해 보고. 음? 아무것도 하기 싫다더니 투두 리스트가 늘어나는 기분 무엇.

집중할 땐 입이 튀어나오던데요.

이런 생각 하면서 물을 붓다 보면, 넘쳐서 발을 적시는 줄도 모르고 계속 들이붓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제야 잡생각에서 벗어난다. 아차. 전화기 받으러 또 가야 하는군. 2 쿡이라 다행이야. 암. 그나저나, 이렇게 정수하면 석회는 다 걸러지는 거래? 에라 모르겠다. 배 아프면 아프라지.


수요일은 금방 돌아왔다. 나는 다시 아침 7시에 일어나 줄을 섰다. 총 2시간을 기다려 9시가 반쯤 내 차례가 왔다. 확인서를 내밀었다.


“전화기 찾으러 왔는데요.”

“잠시만요,”

직원은 수리된 전화기를 들고 나왔다. 소리가 정상적으로 들리는지 확인을 했다. 전화기를 받았다. 헉. 부서진 부분이 그대로다.

“수화기 감도가 아주 양호하네요.”

여기, 수리가 덜 됐는데요?”

“어라. 그럴 리가 없는데. 잠깐만요. 아. 접합이 부서졌군요.” (그걸 이제 알았냐고 이 사람아.)

Malecon, Habana, Cuba.

한참을 고민하던 직원은 “잠시만요” 하더니 사라졌다. 그대로 30분이 흘렀다. 에떽사 사무실 책상 위에 블루투스 키보드 올려두고 일기 쓰고 있게 될 줄이야. 어떤 게 상식일까. 비정상적으로 빠르고 정확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우리나라가 상식인지, 여유롭고 느긋하게 일처리 하는 (=속 터지는) 이 나라가 상식인 건지. 나름대로 느린 문화에 적응 한 나도 이렇게 답답한데 처음 온 사람들은 얼마나 짜증 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직원이 전화기를 들고 왔다.


“이제 됐죠?”


망가진 수화기 접합부에는 본드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래요. 이렇게 본드로 붙여놓으면 다음번에 또 떨어뜨려도 깨지지는 않겠네요. 고마워요. 쿠바인처럼 생각하고 쿠바인처럼 산다는 거. 너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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