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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Feb 12. 2019

남들과 다르게 살 거라고 떠들더니. 결국 취업준비야?

네. 아직 방황 중입니다. 최선을 다해서요.

대학은 졸업했고. 모아둔 돈은 없고. 인턴 월급은 모두 배낭여행에 탕진했고. 남미에서 1년 신나게 놀고 돌아와 새해에 남은 건 마냥 놀고먹기 애매한 스물여덟이라는 나이뿐이었다. 이쯤에서 나오는 말도 안 되는 가정, 내가 일 년만 젊었다면! 취업 걱정 안 하고 하고 싶은 거 마음껏 도전할 텐데! 하이고. 같이 맥도날드 알바했던 이모가 들으면 혀를 쯧쯧 차면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누구 앞에서 늙었대?” 할게 뻔하구먼.


작년에 ‘유난 떠는 스물일곱 살’이라는 제목으로 브런치에 “아! 여러분, 저 나이 든 것 같아요!” 느낌 풀풀 나는 글을 써재꼈다. 지금 읽어보면 “니가?ㅎㅎ” 코웃음 치게 된다. “솔직 담백한 글을 읽으며 30대인 저로서는 괜히 부러운 마음도 든다고 하면 격려가 될까요?”라는 댓글도 달렸다. 아이고오. 독자님들 죄송합니다. 나이 1년 먹었다고 아직 20대인 주제에 “저 너무 늙었나 봐요!”라는 글을 또 써재낀다면, 한번 더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https://brunch.co.kr/@dnjs9523/95)


에헴. 흥분을 가라앉히고. 스물여덟이 애매한 이유는 뭘까. 일곱에서 여덟로 변화는 분명 컸다. 정확히 말하면 서른까지 3년 남았다와 2년 남았다의 차이가 크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일에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기보다는 직장을 잡아서 전문 분야 커리어를 쌓아야 할 것 같다. 낭만과 꿈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무시하기에는 아직도 집에서 부모님 용돈 받아 생활하는 처지가 너무 한심하다.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작년에 올린 글에도 정확히 똑같은 대목이 있었다.

“스물일곱이라는 나이를 생각해 봤어요. 젊다면 한없이 젊은 나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시기인 것 같기는 합니다. 끊임없이 다음 스텝을 생각해야 하고 이제는 좀 전문 분야를 정해서 그 길을 가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주저리주저리. 굳이 7과 8의 차이점을 찾자면, 스멀스멀 올라오던 욕망이 이제 라지라지 올라온다. 이런 개드립도 주체 못 하고 브런치에 적어버리다니 아재 다 됐군!

ㄱ...감사....
평범해지기 싫어서 유독 애썼던 2018년.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비록 불안하긴 하지만 삶의 과업들을 유예할 수 있는 훌륭한 핑곗거리이자 보호막이었다. 졸업하자마자 남미에서 국제기구 인턴을 했고, 그 뒤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으니 지난 1년간은 마냥 백수도 아니었으며 취업 유예에 대한 충분한 핑계도 됐다. 그런데 지금은 대학생이라는 신분도, 모아둔 돈도 없다. 그렇다고 내년에 대한 아무 대책도 없이 그저 이나라 저나라 탕진하며 다녔던 2018년의 나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무계획이 상계획” 이라며 젊음을 즐기기 급급했던 나의 싸대기를 누군가 치면서 “야 이놈아. 너 한국 가서 뭐 될라고 이러고 있어?” 알려준 대봐야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다.


누구도 나에게 평범하게 살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적이고 싶은 욕구는 커진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 마저 쉽지 않다.) 한데 내 생각에 이런 감정은 일시적이다. 이제는 대학생도 아니고 인턴 회사원도 아닌 그저 백수 취업준비생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지고, 빨리 취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이토록 마음이 조급하니 “하고 싶은 일이 뭘까?” 보다 “당장 도전하고픈 분야가 없다면 돈이라도 벌면서 생각해보자.”쪽으로 기운 것이다. 늘 가만있질 못하는 나같은류의 사람은 취직하고도 나름대로 새로운 일을 벌이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Quito, Ecuador

어차피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세상이라면, 그저 불안 불안한 지금 상황을 즐길 수밖에. 불안을 두 개나 겹쳐 쓰다니 어지간히 불안하긴 한가보다. 불안이 극에 달했던 얼마 전에 일기장에 쓴 글이다.

아침 여덟 시 오분 서울 지하철 이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승강장. 육 번 출구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각각 개찰구로 나누어져 여러 개의 대열이 생기고 주기적으로 삑, 카드 찍는 소리가 들린다. 삑, 개찰구를 밀고 들어간다. 삑, 삑,.. 놀라울 만큼 정확한 간격으로 사람들이 나간다.

리듬에 맞춰 개찰구의 봉을 밀려했으나 "카드를 다시 대 주세요."라는 소리와 함께 몸이 밀려난다. 다시 카드를 댄다. "카드를 다시 대 주세요." 불과 몇 초 사이에 뒤에 있던 사람들은 양 옆줄로 이동한다. 세 번 만에 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통과한다. 구로디지털단지에 '접근'이었던 내선순환이 '도착'으로 바뀌었다. 승강장을 향해 뛰어 올라간다.

"카드를 다시 대 주세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리만큼 서럽다. 이십대는 평범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천십일 년 으로부터 팔 년이 지나. 바쁜 출근 시간, 반드시 여덟 시 육분의 내선순환을 타야 하는 사람들. 뒤에서 알게 모르게 들리는 눈총. 빠르게 흘러가는 대열을 따라 가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그냥 그렇게 제 때 '삑' 소리 내고 합류하면 되는 거야. 너무 늦어지면 안 돼...


직장인이 취준생에게 밥을 사줄 때 두 가지 유형의 친구들이 있다. 너는 금방 될 거라며 힘내라고 응원해 주는 친구와 직장 다니면 훨씬 더 스트레스받으니 그때를 즐기라는 친구. 두 친구들 모두 너무 고맙다. 전자는 나를 믿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인생 헛살지 않았다는 고마움, 후자는 애써 위로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비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고마움.


군대를 막 전역했을 때 나를 감싸던 보호막이 하나 걷히면서 갑자기 어른이 된 것만 같아 한동안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그 뒤의 20대 중반은 인생 어느 때보다 즐겁고 후회 없이 잘 보냈다. 일시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하고 싶은 일에 저돌적으로 달려든다면 언제나 그랬듯 새로운 길은 열릴 것이다.


아무런 악의 없이 묻는 “요즘 뭐 해?”라는 말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럴듯한 대답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어느 기업에 취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올 상반기에는 직장이 생기지 않을까요, 혹은 꿈을 위해 무얼무얼 공부하며 달려가고 있답니다. 허허. “별 거 안 하고 삽니다” 하면 마치 오답을 말한 듯 죄인이 된 기분은 덤이다. 관심의 표현은 고맙지만, 꼭 요즘 무얼 해야만 하나. 또 그걸 말한들 뭣하리. 사람들 사이에서 내 이름이 원치 않게 오르내릴게 뻔한데.


그래도 궁금해서 요즘 뭐 하니, 물어보신다면 네. 요즘도 방황합니다. 믿는 구석은 성실한 DNA 하나뿐이지요. 그래요. 방황도 최선을 다해 하고 있답니다. 명확히 하고 싶은 일은 아직도 찾지 못했지만 스물여덟이라는 꽃다운 나이를 표류하며, 취업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내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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