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대가리 May 22. 2019

후회 없는 20 대란, 얼마나 재미없을까.

돌아갈 곳도, 확정된 것도 아무것 없어 불안한 시간이었다. 서류, 인적성, 면접.. 각 전형의 합격자 발표가 나는 날이면 아침부터 마음을 졸인다. 대개는 오후 느즈막에 발표가 났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과 반쯤 체념한 듯 아니면 아닌 거지, 온갖 감정이 섞여 일상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나날들이었다.


부모님의 김칫국 드링킹이 스트레스를 더했다. 이제 고작 서류 넣었을 뿐인데

“너 OO으로 출퇴근하려면 너무 멀지 않니? 면허는 따야겠다.”..

올 초에 공채가 뜬 공기업을 준비할 때는 부모님께 일정을 다 알려드렸다. 서류 결과 발표는 며칠날 나온다, 면접은 언제다.. 발표가 나는 날이면 나도 나지만 부모님의 마음은 더 졸아진다. 한 시간에 한 번꼴로 엄마, 아빠, 번갈아가며 연락이 온다.


14:00 발표 났니?

15:30 아직까지 안 났어? 떨어진 거 아니야?

16:00 그 회사는 왜 발표를 이렇게 늦게 한대? 저번에는 일찍 했으면서!


나보다 더 애타는 부모님 마음은 이해 가지만 취업준비생에게 이런 관심은 부담이요 스트레스였다. 본격적으로 상반기 공채를 준비한 3월부터는 모든 일정을 알려드리지 않았다. 혹여나 취업에 대해 물어보면

“알아서 잘하고 있어요~ 걱정 붙들고 있으면 조만간 좋은 결과 갖고 오지요.” 했다.

엄마는 “참 이상한 애야.” 하면서도 더 묻지 않는다.

잔나비 노래를 내내 들었다.

용돈도 부족했지만 생각보다 남는 시간 많은 것이 괴로웠다. 예전에 일할 때 친분이 있던 매니저 누나의 연락으로 다시 패스트푸드 알바를 시작했다.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은 했지만 정확하게 그대로였다. 패티 굽는 곳과 햄버거 빵 넣는 존을 벗어나지 않고 매일매일 똑같은 일만 반복될 것. 이미 고일대로 고인 곳에서 새로운 업무를 배우고 시도한다는 일은 상상도 못 할 것. (맨날 똑같은 포지션만 시키니 재미도 없고 발전도 없지!!!!!!!!!!!!!!) 3년의 경력이 있지만 매장에서 자리 잡고 있는 기존 알바생들의 텃세가 있을 테니 서로 조심할 것.



그렇게 일상이 자리를 잡는 사이, 꾸준히 서류를 내고 인적성 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봤다. 서류전형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나름대로 스펙보다 스토리 중심의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하기에 쓸 말은 많았다. 기업이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까? 고민하지 않았다. “이런 스타일도 좋아해 줄 곳이면 뽑아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남미에서 호떡 장사한 이야기를 썼다. 협업 경험으로 교환학생 때 포트럭 파티했던 이야기를 썼다. 타인에게 영향력을 발휘한 사례로 흔하디 흔한 군대 분대장 경험과 조금 덜 흔한 ‘병영도서관 개조 프로젝트’ 이야기를 썼다. 덕분에 그냥 브런치에 글 쓰듯 내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다만 스터디 때 다른 분들 자기소개서를 읽으면 내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촌스러워 보인다. 지원한 직무와 인턴 경험의 연결점을 똑 부러지게 찾아내 작성한 글, 아 이런 게 합격 자소서구나! 내 글은 그냥 지자랑을 만연체로 늘여놓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서류 합격률이 절반은 됐던 이유는 아마 ‘전기전자공학’이라는 취업 깡패 전공 덕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그토록 나랑 안 맞다고 불평했던 전공 덕을 톡톡히 본다.


인적성을 준비하면서는 도대체 이게 일 잘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 그냥 똑똑한 사람 뽑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해라 이 사람들아!!!!! 불평하면서도 한발 깨갱, 문제집을 사서 열심히 풀었다. “도대체 이걸 20분에 푼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싶지만 다 풀라고 낸 문제는 아니라는 익명게시판의 한마디에 위로받기도 했다. 엄청 잘 봤다 생각했는데 떨어지거나 망했는데 붙기도 하는 거 보면 도무지 그 기준에 감이 안 온다.

징그러우면서도 눈 딱 감고 한 권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여!!


면접 준비가 제일 힘들다. 미소로 다져진 좋은 인상과 총명(한 척!)한 눈빛, 기본적인 언변에는 자신이 있지만 대부분 전공과 큰 관련 없는 직군들로 지원했으니(해외영업, 경영지원..) 처음부터 공부해야 했다. 어려운 무역 용어들, 회사가 하는 일, 산업군 동향, 경쟁사 분석... 매번 프로그램 돌리며 솔루션을 찾아내던 공대의 프로젝트와는 다른 세계였다. 어쩐지 나쁘지는 않았다. 전공 따라가기가 그토록 벅찼는데 R&D 같은 직군으로 취업을 하려면 그 공부를 다시 해야 했으니까. 그거보단 차라리 이쪽이 훨씬 재밌고 적성에 맞을게다.


면접 스터디를 하며 가장 많이 받은 지적은 “두괄식으로, 조리 있게, 핵심만 간단히”였다. 만연체로 이것저것 얘기하는 내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집중력이 떨어졌고, 질문의 의도와 벗어나 답변이 산으로 갈 때도 많았다. PT면접에서는 스터디원분들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빠른 시간에 자료를 분석하고, 내 생각을 뽑아내 조리 있게 구조화하는 것. 생전 처음 해보는 게 피 말리면서도 은근히 재밌었다.


임원면접의 전략은 “100% 솔직함”이었다. 어차피 최종까지 올라온 사람들의 이력과 스펙은 화려할 게 불 보듯 뻔하다. 나의 경쟁력은 진솔함이다. (근데 다른 사람들도 다 솔직한 데다 이력까지 좋은 게 함정) 모든 질문에 조금 떨리고 긴장되는 목소리지만 꾸밈없이 대답했다. 어려운 질문에 당황할 때는 당황을 숨기지 않고 활짝 웃으며 당황했다. 하하... 그 질문은 제가 조금 더 생각해 본 뒤에.. 답변을 해도 될까요.. 하하하핳..




자소서를 쓰고 면접 준비를 하며 ‘두괄식’에 익숙해졌다. 나조차도 불편한 미괄식이지만 쓰다 보니 이렇게 됐다. 가장 가고 싶었던 기업에 최종 합격했습니다... 아무튼 운이 좋았다. 운이 좋아 전기전자공학과를 선택했다. 공학자들이 필요한 시대에 적절히 태어난 운도 따랐다. 나보다 훨씬 언변도, 스펙도 뛰어난 분들이 취업준비에서 넘어지는 모습을 보며 그저 겸손할 수밖에 없었다. 난 정말 운이 좋았구나.


어느 기업 면접 질문이었다. (최종 합격은 못했다.)


“답변이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주변에서 친구들이 본인을 자유로운 영혼이다, 뭐 이렇게 평가하지 않나요?”

뜨끔했다. 역시, 면접관들은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는가.

“어.. 자유로운 영혼까지는 아니지만,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해내는구나라는 소리는 듣습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한다, 이런 거죠?”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일을 할 땐, " 주저리주저리..


다시 못 돌아올 20대가 아까워서 하기 싫은 일은 과감히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에만 투자해도 아까운 시간들이었다.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지 않을 때는 잠깐씩 현타가 오기는 해도, 후회 없는 청춘이란 얼마나 재미없는 청춘 일지 생각하며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마 '미생'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


이제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세상 앞에 한 걸음 나아갑니다. 새로 펼쳐질 세계는 어떤 곳일까 두렵고 설레네요. 우선은 좀 놀고 오겠습니다. 흐름에 맞춰 다시 달리려면 곱씹을 추억 몇 개쯤은 더 비축해 둬야겠죠.

이전 18화 남들과 다르게 살 거라고 떠들더니. 결국 취업준비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