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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May 07. 2017

섬진강 무전여행기2

곡성-구례

새벽 5시에 눈이 떠졌다. 교회 장의자는 생각보다 잠이 잘 온다. 어쩌면 어디서나 잘 자는 타고난 유전자 덕일 수도 있겠다. 자체적으로 새벽 기도를 드리고 시원한 물로 씻었다. 완연한 7월의 여름이었다. 남부지방에 태풍이 온다던데 날씨가 흐릿하면서도 아직은 더웠다. 아침밥으로는 어제 이장님께서 주신 감자와 자두를 먹었다. 한 개도 남기지 않았다. 양이 하도 많아서 오전 내내 양식이 되었다.


섬진강길을 따라 걷다 보면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는 폐역이 많이 나온다. 그중 일부는 가정역처럼 레일바이크 사업으로 관광화가 되어 있다. 압록역은 서울에서 오가는 열차가 다녔는데 하루 이용자 수가 5명도 안 되어 2008년 결국 폐역이 되었다. 한 때 드라마 ‘모래시계’의 명장면으로 나온 곳이다. 모래시계 소나무 하면 보통 정동진의 고현정 소나무만 기억한다. 압록역은 얼마 전 별세하신 배우 김영애 님의 소나무가 있는 곳이다. 어디선가 두 소나무를 비교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두 여자는 운명을 달리한다. 학생 운동을 주도했던 여대생 혜린(고현정 분)은 정동진 소나무 앞에서 경찰에 붙들려가지만 끝까지 살아남는다. 반면 빨치산의 아내였던 태수의 엄마(故김영애 분)는 또 다른 소나무가 있는 압록역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거의 폐역이 되기 직전이었던 정동진역은 모래시계로 인해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지로 떠올랐지만 압록역은 대중에게 잊혔고 문을 닫았다. 드라마 속 두 여인의 운명과 묘하게 일치한다.

(원문 출처 : http://www.bobaedream.co.kr/view?code=skybr&No=11218)     


정적만이 남아있는 압록역을 지나 행군을 계속했다. 걷기만 하면 심심하니, 사람이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로드 다큐를 한 편 찍었다. 내 DSLR의 최대 장점은 화면을 돌려서 셀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아아, 지금은 섬진강 무. 전. 여. 행 중입니다. 지나가는 분들마다 말 걸면 다 왜 걷고 있냐고, 왜 사서 고생하냐고, 빨리 서울 올라가라고 하시네요. 하하. 저도 제가 이걸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좋은 집을 떠나 여기서 생고생을 하고 있는지. 군대에 있을 때 훈련병 시절, 논산 주변의 논밭을 행군하면서 전역하면 꼭 무전여행을 해 보리라 다짐했어요. 근데 곡성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수도 없이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거 타고 집 가고 싶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조금만 더 걸으면 구례구역이 나올 텐데..     

하지만 지금 포기하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거예요. 그토록 해보고 싶던 무전여행이고, 와보고 싶던 섬진강에 와 있는데 행복해야 되지 않겠어요? 말하자면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루고 있는 셈이니까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저는 지금 진심으로 행복합니다. 하동까지 목표한 게 있으니 걸어야겠죠? 아직 반도 못 왔네요. 파이팅! “     


이렇게라도 셀프 동영상을 찍으니 나름 걸을 힘이 다시 생겼다. 점심 먹을 때쯤 ‘독자마을’이 눈에 띄었다. 이 마을 어딘가에서 일거리를 찾아 점심을 해결했으면 좋겠는데. 독자마을은 풍경이 유독 예뻤다. 집마다 집주인의 문패가 정겹게 붙어 있고, 도둑 들 걱정 없이 대문은 모두 열려 있었다. 아쉽게도 밖에 나와계신 분이 거의 없었기에 밥을 얻어먹는 데는 실패했다. 시간은 이미 오후 1시를 넘었다. 어느 할머니께 여쭈어보니 다음 마을이 나올 때까지 10리는 더 걸어야 한단다. 오늘 점심은 굶어야 하는 건가?


독자마을을 내려와 조금 더 걸으니 ‘하늘 공원’ 팻말이 보였다. 높은 곳에서 섬진강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려니 해서 올라가 보았다. 그곳에는 절이 하나 있었다. 규모가 꽤 컸다. 절에 들를 생각은 없었는데 절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혹시 108개일까 궁금해서 밟아봤다. 한 20개쯤 세다가 까먹었나 보다. 올라가자마자 배낭부터 팽개치고 밖에 계셨던 스님과 보살님께 인사드렸다. 합장은 할 줄 몰라 멋쩍게 있었는데 스님이 먼저 “사진 찍으러 오셨나 봐요” 하시길래 “맞아요. 하하하.”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여자 보살님(이 호칭이 맞는지도 모르겠다.)께서 “점심 공양은 하셨어요?”하셨다. 나는 불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할머니가 신앙심 깊은 불교 신자여서 수능 잘 보라고 부적 같은걸 가방에 넣어주신 기억은 나는데 ‘공양’이 뭔지는 몰랐다. 아마 교회로 치면 헌금이겠거니 해서 얼버무렸다. “네? 공양이 뭐예요?” 하니 “하하. 식사하셨냐고요. 안 하셨으면 이쪽으로 와서 공양하고 가세요.”라고 하셨다.     

우연히 올라온 곳, 그것도 절에서 점심을 얻어먹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절밥은 심지어 맛있었다. 매운탕이 나왔다. 무전여행에서 얻어먹은 매 끼니가 그랬지만, 절밥은 더더욱 남기면 안 될 거 같았다. 밥 한 톨 빠짐없이 싹싹 긁어먹었다. 보살님들은 왜 생전 처음 보는 청년에게 공양 베푸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셨을까? 불교식으로는 나그네가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잘은 모르겠지만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면 되지 않을까? 이건 어떤 종교건 동일한 것 같다.     


같이 점심 공양하며 대화를 나누었던 분이 바로 하늘공원의 이사장님이셨다. 하늘공원은 알고 보니 납골당이었다. 2주 전에 군대에서 제대했다니까 아들처럼 살갑게 대해주셨다. 밥 먹는데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남부지방은 태풍 너구리의 영향권으로 오늘 밤부터 세차게 비가 내리겠습니다.”

밥을 다 먹고 보살님께 인사드리고 절을 내려왔다.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조금 더 걸으니 드디어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곡성을 지나 구례에 왔다. 구례에서는 주로 ‘백의종군로’를 따라 걸었다. 자전거 길인데 섬진강을 끼고 있어서 운치가 좋다. 곧이어,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비를 준비하긴 했지만 내 신세가 갑자기 너무 처량해졌다. 그 예뻐 보이던 백의종군로가 죽음의 길처럼 느껴졌다.      

저녁시간이 다가왔다. 교회가 눈에 보였다. 야호. 오늘은 여기서 묵을 수 있을까? 시도해 봤다. 똑똑똑.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온 청년인데요. 섬진강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무전여행을 하고 있어요. 오늘 하룻밤만 교회에서 묵을 수 있을까요?”

“어디 소속이요?”

“아, 저는 예수교장로회 OO 교회에 다니는 대학생이에요. 선교단체 활동도 하고 있고요.”

“잠깐 기다려봐요.”

요즘 어디나 그렇지만 시골 교회는 특히 이단의 영향력이 강력하다고 한다. 이 지역도 신천지 때문에 여러 문제가 있었단다. 그래서 날 보고 처음에는 경계하셨지만 사모님과 상의하시더니 이내 보통 청년임을 아시고는 자식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묵을 수 있는 작은 방을 안내해 주셨다. 게다가 따뜻한 이불과 베개까지 붙여주셨다. 씻고 와 보니 저녁밥을 한 상 차려주셨다. 오늘 새로 한 반찬들, 게다가 밥도 고봉밥이다. 하루 종일 걸어서 지쳐있던 터라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치며 폭풍 흡입했다. 밥 한 그릇을 10분 만에 다 먹어버렸다. 아. 남도 음식은 먹을수록 그 매력에 푹 빠진다. 사실 이런 대접이 나그네의 분수에 맞는지 모르겠다. 내가 도와드린 일은 기껏해야 청소와 설거지인데 나는 이렇게 맛있는 밥을 양껏 먹고, 이렇게 편한 곳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여행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괜히 더 초라해진다. 돌아가면 받은 것 이상의 사랑을 꼭 세상에 베풀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섬진강변에서는 밤새 비바람이 몰아쳤다. 아마 태풍 너구리의 영향인가 보다. 자연 바로 옆의 숙소, 휴대폰 플래시를 켜는 순간 달려드는 벌레들, 비와 바람소리. 스물셋 청년에게 여름밤의 낭만이 하나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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