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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Jun 15. 2017

섬진강 무전여행기 3

사랑의 선순환

무전여행 3일 차. 구례를 거쳐 화개로 가는 여정이다.     

짐을 다 싸고, 차려주신 아침밥도 맛있게 잘 먹었다. 하루 묵었던 방에서 사진을 또 찍었다. 한 10년쯤 뒤에 사진을 다시 봐도 이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나겠지? 목사님과도 헤어졌다. 나중에는 무전여행이 아니라 정식 여행자로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씀드렸다. 버킷리스트가 생겼다. 결혼하거든 아내와 함께 섬진강에서 신세를 졌던 모든 분들에게 맛있는 소고기를 들고 찾아뵙는 것이다.

다시, 섬진강변을 따라 길을 나섰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비가 올 느낌이다. 그래도 섬진강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아름답다. 특히 구례구의 섬진강은 지리산과 더해져 그 풍경이 가장 멋지다. 이윽고 비가 세차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바지, 셔츠, 카메라 가방이 모조리 다 젖었다. 운동화도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신나게 노래 부르며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는 비가 내 기분을 망쳤다. 진짜,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걸까란 생각이 잠시 스쳤다.     


비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길을 가려는데 어떤 차가 경적을 빵빵 울렸다. 나를 태워주려는 분이거든 정중하게 거절해야지, 생각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잠깐 멈추는 듯하더니 다시 쌩 하고 가버리셨다. 알고 보니 비옷을 입을 때 밀짚모자를 떨어뜨리고 그냥 왔는데 그걸 발견한 운전수 분께서 주워가라고 경적을 울리신 거였다. 덕분에 밀짚모자는 안 잃어버렸지만 내 신세는 여전히 처량했다.     

자전거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이 길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떤 할머니가 일러주신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계속 같은 풍경만 보이니 슬슬 걱정이 됐다. 다리 하나 건넜더니 방금 온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다시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핸드폰을 켜서 위치를 확인하면 된다. 간단하다. 그런데 그러기 싫었다. 핸드폰은 비상시가 아니면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여행이었다. 에잇. 될 대로 되라지. 지도만 바라보며 막무가내로 걸었다. 잠시 후, 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오봉정사’가 나왔다. 1시간가량 걸었던 그 길이 바로 섬진강의 ‘수달생태로’였다.     


그 감격의 물결은 섬진강 둑길까지 이어졌다. 태풍 너구리의 영향권에 들어서인지 비바람이 마구 휘몰아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태풍 따위에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신이 나서 다시 입으로 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태풍조차 낭만적이었다. 1시간 전만 해도 모든 게 꿀꿀했는데.. 하루에도 감정이 양 극단을 왔다 갔다 한다. 이게 바로 무전여행의 묘미겠거니 한다.     

둑방길 초입에 관광안내소가 있었다. 직원분들에게 인사하니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하고 가라며 따뜻한 커피를 주셨다. 어디서 왔는고? 서울에서 온 청년입니다. 무전여행 중이에요. 아이고, 대단하다. 밑으로 내려가거든 인심 좋은 마을들이 많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 하동에 가면 쌍계사를 꼭 가봐. 아마 재워줄 수도 있을 거야. 근데 이 추운데 감기 걸리지는 않았어? 하하. 어머님. 저는 멀쩡합니다.

정이 듬뿍 담긴 커피를 한잔 하고 어르신들의 관심을 듬뿍 받았다. 덕분에 잘 쉬고 다시 출발했다. 드디어 이정표에 구례와 하동이 갈라지는 게 보였다. 화개장터 무렵에 다다르니 조영남의 화개장터 노래를 입에서 흥얼거리게 된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에 - 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 -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 구경 한 번, 와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 있어야 할 것 다 있고요. 없을 건 없답니다, 하이마트 (응?)     

중간에 있는 전망대에서 사진도 찍고 갔다. 이 사진을 찍어주신 어느 아저씨에게 마찬가지로 무전여행 중인 청년이라고 소개를 드렸다. 자기도 하동까지 가는 길이니 태워다 주겠다고 하셨지만 섬진강을 걸어서 구경하는 중이라고 말씀드리며 정중히 거절했다. 호의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다. 아버지는 뭐하는 분인지, 어머니는 뭐하시는지, 몇 살인지, 어느 대학을 다니는지.. 어른들은 다 비슷한 걸 물어보신다.     

조금 더 걸으니 ‘송정마을’이 나왔다. 꽤 가파른 언덕을 따라 올라갔다. 오늘 점심을 이곳에서 구할 수 있을까?     

감사하게도, 마을 들어가자마자 있는 첫 번째 집에 어느 할아버지가 나와 계셨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는 무전여행 중인 청년인데요. 뭐, 일거리 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서울서 왔다고? 잠깐만 있어봐. 우리 집사람한테 한번 물어볼게.”

할아버지는 잠시 후, “같이 밥 먹자, 들어와.” 라며 불러주셨다.     

할머니께서는 마침 오늘 호박을 처음 따서 호박전을 했다며 먹어보라고 밥을 챙겨주셨다. 와. 이건 정말 갓박전이다. 뿐만 아니라 김치, 소시지, 멸치 등 모든 반찬이 너무 맛있다. 전라도 음식이 맛있단 말은 들었는데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진짜 뭐라도 도와드리고 싶어 죽겠는데, 일거리는 없으니 쉬다 가라고 하신다. 오히려 비 오는데 춥지 않았니, 따뜻한 물 틀어줄 테니 샤워하고 갈래, 정말 아들처럼 대해주신다. 함께 밥을 먹으면서는 지리산에 역사 탐방? 차 왔던 대학생들이 이 집에서 하루 묵고 간 이야기를 해주셨다. 당시에 밤이 너무 늦었는데 잘 곳이 없어 10명 정도의 학생들이 할아버지 댁에서 자고 갔다고 했다. 그중에서는 커플도 나왔는데, 그 커플들은 이후에도 종종 이 댁에 찾아왔는데, 최근에 결혼해서 선물을 들고 왔다고 했다. 나도 나중에 이분들을 다시 찾아뵐 기회가 있을까? 꼭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출발하려는 채비를 하는데 방울토마토를 챙겨주셨다. 걸어가면서 먹으라고. 후아.. 나란 인간. 정말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데 이걸 받아도 되는 걸까. 시골 인심에 그저 소름이 돋을 뿐이다.

“할머니, 저 기억하실 수 있겠어요?” 하니까 “오늘 호박을 처음 땄으니까, 호박 청년으로 기억하면 되겠구먼.”이라고 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 호박 청년은 지금도 당신들께서 가르쳐 주신 가치관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답니다. 꼭 결혼해서 아내와 함께 찾아뵐게요. 그때까지 건강하셔요.

마지막으로 같이 사진을 찍자고 부탁했는데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한다며 집 사진이나 찍어가라고 하셨다. 겉모습도 너무 멋진 시골집이다. 길을 나서려는데 아직 비가 그치지 않았다며 카메라 가방을 감쌀 수 있는 봉지를 주셨다. 그냥 주신 게 아니고 손수 감싸 주셨다. 또 길을 나서려는 내 손에 할머니께서 꼬깃한 돈 6000원을 쥐어주셨다. 화개장터에 곧 도착할 테니, 맛있는 거라도 사 먹으라며. 돈 없이 여행하는 거는 무지 위험하니 이걸 쓰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알면 뭐라 할 테니 얼른 출발하라고 하셨다. 할머니, 여행 원칙상 이 돈은 받을 수 없어요. 마음만으로도 정말 정말 감사해요. 이것까지 받으면 저는 정말.. 염치가 없답니다. 그러나 결국 천 원짜리 여섯 장을 내 주머니에 찔러주시는 마지막 손길을 무시하지 못했다.

송정마을을 출발해서 다시 길을 나서는데, 비가 내려서 다행이었다. 그 돈 6000원에 그만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함부로 쓸 수 없는 6000원이었다. 이 돈은 고스란히 이날 묵게 된 교회에 헌금했다.     

밥 두 그릇으로 단단히 힘을 얻고 다시 강을 따라 걸었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전남에서 경남으로.     

마침내 화개장터에 도착했다. 보통 생각하는 장터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유명한 관광지에 가까웠다. 관광지여서 그런지 이름만 장터고, 장 서는 날이 따로 있지 않단다. 매일매일이 장날이란다. 장터를 빠져나와 쌍계사로 향했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에 나오는 그 쌍계사다. 고등학교 때 언어영역 공부를 하면 늘 나오던 소설 중 하나였다. 보통 그냥 지나치게 마련인데, ‘역마’라는 소설은 제목부터 눈에 띄었다. 역마살. 그 단어가 함축한 자유로움이 좋았다. 보통은 소설을 읽고 문제를 푼 다음 줄거리를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는데 유독 역마는 몇 번이고 더 읽게 되었다. ‘역마살’에 대한 은근한 동경은 이때를 즈음해서 생겼나 보다.


쌍계사 가는 길은 5km의 상행이다. 차로 가면 10분이면 갈 텐데.. 중간에 히치하이킹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내 인상이 험상궂나? 모르겠다. 그냥 한 시간 걸어가지 뭐. 마침 송정마을 할머니가 챙겨주신 토마토도 있으니 지겹지 않았다. 올라가는 길목에 교회가 있어서 오늘 하루 숙박을 부탁했다.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너무 감사하게도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이 감사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잠시 쉬고 있는데,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셨다. 사모님께서 차려주신 밥상이 어마어마했다. 특히, 매실 장아찌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달콤 시큼한 그 맛! 어느 밥에도 잘 어우러지는 완벽한 반찬이었다. 사모님은 “반찬이 없어서..”라며 말끝을 흐리셨지만 아니다. 무전여행 중인 내 눈에 이건 진수성찬이다. 집에서도 이렇게 못 먹는데..

매실장아찌, 가지무침, 멸치 조림, 육개장 (너무 맛있어서 세 그릇 먹었다..), 오이 고추, 김치, 다 너무 맛있다. 이제 보니 전라도 음식만 맛있는 게 아니고 남도 음식이 다 맛있나 보다. 무엇보다 멸치를 제외한 모든 반찬이 직접 유기농으로 재배한 거라고 하셨다.

분에 넘치는 밥을 먹으며 목사님께 여쭈어봤다. 제가 이렇게 섬김 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그러자 목사님은 성도들은 추수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하나님은 그 마음을 받으시고, 물질은 교회에서 받게 되고. 교회는 그 받은 것을 다시 나그네와 이웃들에게 나누는 거야. 그럼 나그네는? 그 받은 사랑만큼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면 되는 거지.라고 하셨다.     

사랑의 선순환. 설교로도 많이 듣고 익숙했지만 이 선순환을 몸소 실천하는 목사님의 모습, 또 실천한 바를 청년에게 몸소 가르치시는 모습이 좋았다. 수요일 예배를 드리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내일은 더 많은 길을 걸어야 할 텐데..


밤새 태풍 너구리가 시끄럽게 지나갔다. 태풍을 따라 무전여행의 하룻밤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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