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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Aug 05. 2017

을 of 을

너는? 병이니? 정? 아니. 한 '계'쯤 될껄.

※ 본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경비 아저씨나 청소 노동자 분들을 일반화해서 비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노동자분들을 존중하며 존경합니다.


“북아현동 그 손님, 또 주문 들어왔다! 누가 갈래?”

“아.. 이번엔 저 안 가요. 동현아! 네가 가라!”


햄버거병 사건이 터진 이후로 딜리버리 주문 시 유독 ‘패티를 바싹 익혀주세요’라는 추가 멘트가 자주 온다. 패티는 사실 버튼만 누르면 기계가 알아서 구워주기 때문에 거기서 더 바싹 익히기 어렵다. 그릴판에 오래 놓아두면 뭐 좀 더 익긴 하겠지만 소고기 특유의 맛이 확 가버린다. 그래도 저런 주문은 이해할 수 있다. 안전에 신경 쓰는 거야 사람의 당연한 심리이고 소비자의 권리이니까. 그런데 이 권리를 남용하는 분들도 계시다. 배달 가는 라이더분들이 모두 피하는 손님들이 있다.


나는 오토바이 탈 줄 몰라서 배달은 해본 적 없으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북아현동 저분은 꽤 악명 높다. 주문을 엄청 까다롭게 하고서는 맞는지 하나하나 체크해본다. 뭐, 이거도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더 나간다. 감자튀김의 양과 뜨거운 정도를 가지고 지적하는 건 기본이다. 북아현동까지 배달하는 동안 식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감자튀김은 아무리 많이 넣어도 시간이 지나면 쪼그라들기 때문에 양이 적어 보일 순 있다. 그래서 배달 가는 감자는 통상적으로 매장에서 팔리는 감자튀김보다 조금 더 넣어서 나간다. 지적만 하고 끝나면 다행인데, 꼭 환불 혹은 교환을 요구한다. 라이더들은 꼼짝없이 제품을 다시 가지고 오거나, 환불을 해 줘야 하는 거다. 그 자리에서 환불을 하면 다행인데, 먹다가 중간에 전화로 컴플레인을 걸기도 한다. 거의 다 먹어놓고는 소스의 양이 너무 적다느니, 양상추의 양이 너무 많다느니. 많아도 ㅈㅣㄹㅏㄹ, 적어도 ㅈㅣㄹㅏㄹ이다.


알바 입장에서는 복장 터진다. 우리 매장은 Made for you(MFY)라고 해서, 타 매장과 달리 제품을 미리 만들어놓지 않는다. 주문이 뜨면 바로 빵을 토스팅 한다. 그래서 감자튀김에 소금 빼 주세요, 햄버거에 소스를 많이 넣어 주세요, 토마토 빼 주세요 이런 요구사항에 맞추어 제품을 바로 만들 수 있다. 이것저것 빼거나 더 넣어달라고 하는 손님들을 보면 기분이 나쁠까? 아니다. 오히려 손님의 입맛에 맞게 햄버거를 제작 해 드릴 수 있다는 기쁨이 더 크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런데, 진상 손님들은 다르다. 딱히 합리적인 이유가 안 보이는데도 갖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제품의 환불 혹은 교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유 없는 갑질이다.

보통 갑질을 당하는 사람들 하면 경비아저씨, 청소하는 분들을 떠올린다. 가장 ‘을’의 위치에 있기 쉬운 분들이다. 나는 패스트푸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갑질 공식을 새로 써봤다.

건물주 밑에 경비아저씨, 경비아저씨 밑에 햄버거집 알바생이 있다.

처음엔 건물주가 누군지도 몰랐다. 어느 날, 지하 창고에서 물건을 잔뜩 챙겨 박스에 담아 1층 매장으로 운반하고 있었다. 들고 가기에는 무거워서 박스 한쪽을 잡고 바닥에 끌고 왔다. 이걸 본 웬 아주머니가 “저기요. 바닥에 끌지 말아줄래요?” 하는 거다. 그러자 경비아저씨도 달려와서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전부터 이거 끌지 말라고 했잖아!”

평소 같았으면 “죄송합니다” 했을 텐데, 오기가 생겼다. “아. 이거요? 이거 너무 무거워서요^^” 하며 박스를 그냥 끌고 매장으로 들어갔다. 알고 보니 그 아줌마가 건물주였다. 어쩐지. 경비아저씨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하더라니. 아무튼. 나는 건물주에게 잘 보일 필요가 전혀 없다. 가진 것 없는 알바생이니까. 그냥 한 번 개겨봤다. (물론 그 뒤에 점장님께 혼났다. 하하. 건물 바닥에다가 물건 함부로 끌고 그러는 거 아니다.)

그래. 경비아저씨는 늘 우리가 하는 일에 참견했다. 7층의 피부과 의사 선생님들과는 늘 웃으며 인사하셨다. 15층의 비뇨기과 의사 선생님들과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유쾌하게 지내셨다. 그런데 유독 1층의 우리 햄버거집 알바생들에게는 좀 매정했다. 인사를 안 받아준 건 아니지만, 그런 밝은 웃음은 아니었다. 물론, 우리가 사고를 좀 많이 치기는 한다. 워낙 무거운 물건을 많이 나르다 보니 엘리베이터나 문 등 여기저기에 흠집이 나곤 한다. 근데 뭘 잘못해도 다 햄버거 가게 알바생들 탓이다.


알바생들이 무거운 것을 나르다가 언덕을 오르지 못해 카트가 쓰러져도 강 건너 불구경이다. 어디 다친 데는 없니 묻기는커녕 “쯧쯧. 구루마에 그렇게 많이 실으니까 무너질 수밖에 없지. 내가 맨날 말하는데도 너네는 어떻게 그렇게 일을 못하냐.” 핀잔을 준다. 어라. 이 아저씨가 정말 건물주 앞에 90도 허리를 숙이던 그 아저씨 맞는가.

우리 매장은 워낙 빡세서 알바생들이 금방 관두고 자주 바뀐다. 그래서 이런 디테일에 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말이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들어선 건물 치고 이런 상처가 안 난 곳이 있을까? 어차피 다 보험 처리되어있고, 우리 측에서도 최대한 주의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따지고 보면 건물 바닥, 벽에 난 흠집은 우리 잘못이 맞다. 그런데 우리가 하지 않은 것까지 다 알바생들 탓으로 돌려버리니까 기분이 상하는 거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일을 하다, 급똥이 마려워서 화장실에 갔다. 아침 7시 반쯤이었다. 시원하게 일을 보는데 들어간 지 5분쯤 됐나? 밖에서 청소 아주머니의 혼잣말이 들렸다. “어휴. 왜 안 나오고 저러고 있대.” 응? 설마 날 두고 하는 소린가? 일을 마무리하고 밖에 나왔다. 나오자마자 아줌마는 내 얼굴을 보는 둥 마는 둥 대걸레질을 쓱 쓱 하면서 한마디 하셨다. “아침에 청소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화장실에서 그리 오래 있으면 쓰나..” 이 수치감과 모멸감은 겪지 않아보면 모른다. 나는 이 세상 모든 노동자들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청소 노동자, 경비아저씨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빈정 상했던 건 그분이 청소노동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나름 단시간에 일을 처리했다 생각했는데, 그분에겐 그 시간이 참 길었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랐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을 of을’을 견뎌야 할 때가 많았다. 오늘 온 자재들을 카트로 날라 지하로 내리는 작업 도중에, 재료들을 너무 높게 쌓아버렸다. 맨 밑에 깔려있던 기름 깡통이 미끄러지더니 바닥으로 엎어졌다. 순식간에 모든 박스들이 와르르 내려왔고 일부는 찌그러지고 오일통은 터져서 기름이 새어 나왔다. 하필 본사에서 높은 분이 오느라 매장에 칼각을 잡는 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다치지 않았니?”라고 먼저 물어봤을 심성 좋은 부점장님도 우리에게 혼을 내셨다. “어휴. 왜 하필 오늘이니.”


어찌어찌 쏟은 기름들을 정리하고, 다시 침착하게 물자들을 내렸다. 지나치게 빈정이 상했던 어느 날, 경비아저씨의 잔소리, 무거운 물자들, 아침 7시 출근으로 피곤한 몸 상태, 본사 직원의 방문. 모든 여건이 더해져 스트레스가 폭발했다. 표출할 방법이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 안에는 나 혼자였다. 이 엘리베이터는 ‘1’을 누르면 ‘1층’이라는 안내 음성이 나온다. 다시 한번 ‘1’을 누르면 ‘1층 취소’라는 음성이 나온다. 지하 2층부터, 15층까지 차례로 버튼을 눌렀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화난 손님이 처음인 가요. 자. 이제 할 일은, 15층부터 지하 2층까지 버튼을 다시 마구 누르는 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이 열리면 나는 1층으로 나올 거다.

    

문이 열렸다. 경비아저씨가 있었다. 도도하게 걸어 나와 매장으로 들어갔다. 내 등 뒤로는 기계같이 딱딱 정확하면서도 부드러운 엘리베이터의 안내 음성이 마구 울려 퍼졌다. “12층, 13층, 14층. 15층. 15층 취.소. 14층 취.소. 13층 취.소. 12층 취.소. 11층 취.소. 10층 취.소. 9층 취.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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