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 San Cristobal de las casas
2015년 12월 15일
와하까에서 12시간 야간 버스를 타고 도착 한 산크리스토발데라스카사스. 어디서나 잘 자는 유전자를 타고났기에 야간 버스도 불편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눈을 떴는데 그때마다 창 밖을 보면 엄청나게 별이 많이 떠 있었다. '산크리스토발데라스카사스'. 너무 기니까 편의상 산크리라고 해야겠다. 산크리의 느낌은 와하까와 비슷한데 더 예쁘고 물가가 훨씬 저렴하다. 대부분 음식과 기념품이 2/3~ 절반 가격이다. 형형색색의 건물이 늘어진 사진을 어디선가 보고는 "여긴 꼭 가봐야지"라고 다짐해서 온 도시였다. 여행 책에도 안 나와있고, 별다른 정보도 없이 그냥 왔다. 1박 2일 동안 지내면서 말 그대로 '쉬어간' 도시였기에 혼자만의 시간을 잘 즐겼다. 덕분에 이야깃거리가 많진 않지만 여행지로서의 매력이 충분한 이곳의 사진을 몇 장 올려본다.
지도한 장 펴놓고 앉아서 잠시 쉬고 있는데 어느 할머니가 팔찌를 여러 개 들고 다가오시더니 "4개 20페소" 하신다. 관심 없는 척했더니 "6개 20페소!!" 하신다. 잠시 망설이다가 "음.. Siete?" (7개는 안 돼요?)라고 여쭈니 Ok 하신다. 더 불러도 될 것 같았는데 할머니 연세가 지긋하셔서 그냥 구입했다. 기분은 좋다. 예쁘니까.
시장 뒤편에서 파는 옥수수. 가격을 여쭤보니 10페소라고 한다. 나쁘지 않지만 별로 옥수수가 땡기지 않아 돌아서려는 찰나, 곧바로 "Cinco!" (5페소!)를 부르신다. 그래서 먹었다. 가격은 깎은 대신에 제일 작은 걸로 주셨다.
저녁을 때우기 위해 찾아간 길거리 타코 집. 사람이 가장 많이 줄 서 있는 곳으로 갔다. 실패할 수 없는 맛이다. 개당 5페소(350원) 밖에 안 한다. 너무 맛있어서 더 먹으려다가 참았다. 오늘 돈을 너무 많이 써버렸다. 다 먹고 나니 어둑어둑 해졌는데 낮엔 그냥 막 돌아다녔던 시장 골목이 밤에는 또 낯설었다. 길을 잃었다. 괜히 무서워서 등에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30분 넘게 시장 주변에서 헤맸다. 뺑뺑 돌아 호스텔로 가는 길을 찾았다. 시장에서 겨우 3분 거리였다.
2015년 12월 16일
산크리에서의 둘째 날. 이른 아침부터 시장을 향했다. 머리가 꽤 길었으니 비니 하나쯤은 필요했다. 처음 발견한 집에서 내 가방과 똑같은 빨노초 무늬의 비니를 저렴하게 팔고 있었다. 50페소 달라는 걸, 좀 깎아서 45를 불렀더니 살그레 웃으시며 "No~" 하신다. 난 한국인이다. 난 학생이다. 그래서 돈이 없다. 스페인어로 아무리 외쳐도 "No~" 만 하신다. 장사 좀 할 줄 아시네. 일단 포기! 그래도 가격 비교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장통을 다 돌아다녔는데 그만한 디자인과 가격이 없다.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이 시장 구조가 좀 특이하다. 중앙에서 길이 6갈래로 갈라진다. 한 길로 들어가서 뒤적거리다가 그 집을 못 찾아서 조금 돌아가니 다시 그 중앙의 다른 통로로 나온다. 이것은 마치 티베트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문 같다. 이곳으로 가면 인간, 저곳으로 가면 동물, 또 저기는 극락... 결국 30분쯤 헤매어 다시 그 집, 그 아저씨를 찾았다. "네가 다시 여기 올 줄 알았지." 하는 여유로운 표정이다.
길에서 사진 찍고 있는데 무리의 학생들이 "Ni hao!" 하길래 "Soy Coreano"(나 한국인이야.)라고 말해줬다. "니들이 갖고 있는 삼성 폰 있지? 그게 바로 한국산이야."라고 바디랭귀지로 말해 주었다. 한국에 있을 땐 삼성에 1도 관심 없고 핸드폰도 아이폰을 썼는데 남미에 오니 핸드폰이며 TV며 삼성제품이 참 많다. 여기서 괜히 자부심을 느끼는 게 뭔가 부끄러웠다. (나라가 원하는 대로 잘 교육받은 시민이 된 것만 같아서?) 이번 학기 듣는 라틴아메리카의 문화 수업에서 중남미와의 무역 흑자가 200억대를 넘었다고 배웠다. 내 기억에 중남미에서 한국 제품은 이미 한국에선 쓰지 않는 오래된 LG 티브이와 옛 모델의 삼성 핸드폰 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200억의 흑자가 나는지 여쭈어 보니, 역시 전자제품이 크다고 하신다. 우리에겐 더 이상 필요 없는 물품들을 중남미에 파는 것이니 흑자가 날 수밖에 없다고 하신다. 아무튼 내 미약한 스페인어 하나에도 자기들끼리 깔깔 웃는 모습이 어찌나 순수하던지. 먼저 사진 찍자고 제안까지 했다.
중남미에 다녀온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여행 중에는 돌아오자마자 포스팅을 해서 사람들에게 정보를 나누어 줘야지 라고 생각했다. 막상 돌아오니 대학생으로 바쁜 생활이 1년째 이어진다. 근데도 겨우 2달 있었던 중남미에서 체득한 그 느긋함은 어느덧 나의 생활 패턴의 일부가 되었다. 1~2년 전 이맘때쯤은 꿈을 이루기 위해, 남들보다 더 벌고 더 공부하기 위해 살았다. 내 시간이 침해받는 것을 극도로 피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경쟁하기를 꺼리고 다른 사람들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줄 때 얻는 기쁨을 깨달았다. 성과가 안 나더라도 느리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간다. 똑같은 말을 친구에게 했더니 "그건 네가 여행을 갔다 와서 그런 게 아니고 나이를 먹어서 지혜를 터득한 거 아니니?"라고 한다. 사실 구분은 안 가지만 나이가 먹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니까. 라틴의 여유와 열정이 내 안에 새로운 유전자가 되어 남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련다.
처음엔 사람들에게 많은 정보를 나누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중남미에서 쓴 일기장을 다시 읽어봤다. 음식점을 찾아가는 방법은커녕 음식 이름 조차 제대로 안 쓰여있다. "치킨 위에 검은 소스가 뿌려진 그 음식은 별로였다.", "숙소에서 10분쯤 걸어가면 있는 그 시장에 세 번째 모퉁이에 푸짐한 아주머니가 차려주시던 푸짐한 소고기 요리가 저렴하고 맛있다." 따위의 묘사만 되어 있으니. 이런 게 정보가 될 리가 없다. 하긴. 스마트폰도 일부러 안 보고 지도도 100배 즐기기 달랑 하나 들고 떠난 여행이니, 정확한 정보가 남아있는 게 더 이상하다. 그런 구체적인 정보엔 별 관심 없고 기록하는 스타일도 아니니까 말이다.
목적을 바꿨다.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은 내 글이 아닌 다른 글을 보면 되는 거고, 나는 그냥 내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것에 최대한 집중해 보자. 그런 생각을 하니 여행 포스팅 하나하나가 즐겁다. 뭔가 알차야 한다는 부담감도 좀 내려놓아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