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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Mar 22. 2017

#5 외계인도 더위 먹을 정글

멕시코 - 빨렌께 (Palenque)

당신 정말 외계인이었나요?

야간 버스가 점점 익숙해진다. 겨우 6시간이었는데 너무 잘 잤다. 빨렌께에 내리니 공기가 확 습해졌다. 터미널에서 나오자마자 투어사에서 호객 행위를 한다. 빨렌께 + 미솔아 + 아구아술을 묶은 투어에 450페소를 불렀다. 돈이 없다고 하니 400까지 깎아준다. 터미널을 왔다 갔다 하며 30분은 고민했다. 여기서 돈을 아껴서 칸쿤에서 더 많이 쓸까? 아니면 눈 딱 감고 투어 다녀올까? 사실 400이면 28000원이고 입장료도 포함이니까 비싼 편은 아닌데 이놈의 가난한 대학생. 오랜 고민 끝에 투어에 참여했다. 빨렌께까지 같이 간 2명은 벨기에 커플인데 이들 사이에 낄 수가 없었다. 여기 여행객들은 대부분 유럽인인데 스페인어에 능통하다. 영어도 잘한다. 자기 나라 말도 잘 하겠지.

빨렌께는 온두라스, 과테말라,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걸쳐 있는 마야 문명의 3대 유적지 중 하나이다. 6-9세기 사이에 예술, 종교, 천문학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다. 특히 빠깔 왕 때 전성기를 맞았는데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도시 전체가 사라졌다. 일각에는 빠깔 왕이 외계인이었고 외계인의 통치로 인해 빨렌께가 성장했다는 설이 있다. 내가 빨렌께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마야 중심 유적지의 웅장함에 덧대어 삭막하고 음산한 열대 정글의 분위기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날씨가 무지 덥고 습하다. 조금만 돌아다녀도 땀이 비 오듯 쏟아지지만 그것 이상으로 유물 하나하나가 신기하다. 어디선가 우는 새소리, 한가운데를 흐르는 물소리가 적막한 기운을 더한다. 입구를 들어오면 바로 '비문의 신전'이 보이는데 내부 대리석에 마야 문자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여기 올라가는 계단은 69개로, 빠깔 왕의 통치기간 69년을 상징한단다. 아쉽게도 지금은 계단 위로 출입이 통제되어있다.

빨렌께의 모든 유적은 원래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열대 우림의 비를 맞으며 그 빛깔은 쇠했다. 이제는 정글 속에 어두운 회색 빛 돌무더기만 남아 있다. 빨렌께에 가거든 잠시 눈을 감고 빨간 궁전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던 호화로운 도시를 상상 해 보시기를. 나 역시 잎사귀 피라미드를 올라가다가 잠시 누워서 하늘을 바라봤다. 밀림 속 폐허 유적지, 까마귀 소리(까마귀가 아닐 수 있지만 느낌상 까마귀 여야 할 것 같다.) 한편의 수묵담채화 같다. 미스터리는 오늘날에도 풀리지 않고 있다. 극도로 번영했던 이 도시는 왜 한 순간에 쇠퇴했을까? 뛰어난 천문 관측 술, 건축술, 달력을 소유했던 마야인들이 한순간에 왜,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빠깔 왕, 당신은 정말 외계인이었나요? 지구에서의 일을 다 마치고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가기라도 한 건가요?


정글 지대의 취약점은 물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빠깔 왕은 도시의 정 중앙에 수로를 내고 경사를 만들어 곳곳에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우기에 이곳에 물이 고이게 하고, 건기에 모아놓은 물을 사용했다.

수묵담채화 같다.

출구 쪽에는 마야 여인들이 목욕하던 연못과 폭포가 있다. 캐리비안의 해적에 나올 법 한 신비한 곳이다. 길을 따라 나왔다. 물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길거리 아저씨가 큰 건 25, 작은 건 20페소(1500원)란다. 몹쓸 사람들! 큰 걸 20에 달라고 하니, 오케이 하신다. 근데 동전지갑에 18페소밖에 없길래 보여주면서 그냥 18에 달라고 하니까 "쉿!" 하며 주변 사람들 본다는 제스처를 하고는 물을 주셨다. 7페소나 깎았다. 그래도 여전히 도둑맞은 기분이다. 밖에서는 8 페소면 사는 것을. 투어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귀여운 꼬맹이들이 호객 행위를 했다. 마야 상형문자가 그려진 딱 봐도 질 나쁜 목걸이였다. 각 달마다 마야의 수호신이 그려져 있는 거였는데 생일을 물어보길래 12월이라 했더니 하나를 쥐어 주었다. 하나 더 사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길래 엄마나 줄까 해서 5월꺼 달라고 했다. 나름 가격도 처음 부른 거에서 절반 깎아서 샀긴 했다. 근데 한국 돌아와서 보니 배낭 안에서 다 깨져있었다. 왜 산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아마 어린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그랬나 보다. 꼬마들이 장사하는 건 반칙이다 정말.

빨렌께 투어를 마친 후에 미솔 아 폭포와 아구아줄 계곡으로 갔다. 투어 차에 15명가량이 타고 있었다. 내리자마자 혼자 온 것처럼 보이는 레게머리 한 흑인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콜롬비아에서 온 LuisCarlos다. 내 다음 행선지가 콜롬비아라고 하니 반겨주었다. 메데진에 산다기에, 거기 가거든 꼭 연락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메데진에 가서 연락은 했는데 남미 사람들 특유의 느긋함 덕분에 약속 시간은 못 잡았다. 나 역시 그 느긋함에 적응돼 있었는지 보면 보고, 안 보면 안 보고 이런 마인드였다.) 그리고 루이스와 같은 호스텔에 있던 이탈리아 여자애 라부도 같이 다녔다. 이동하는 내내 루이스와 대화했다. 박찬욱, 김기욱을 알고 있다고, 한국 영화를 좋아한다고 한다. 한국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스페인어를 연습해야 하니 서로 스페인어로 대화했다. 콜롬비아 여자들이 무지 예쁘다고 자랑한다. 한국어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를 알려줬더니 너무 어렵다고 한국 가기 싫어졌다고 한다.

아구아술(Agua Azul)은 직역하면 파란 물이다. 날씨도 적당히 맑고 습하고 비가 안 와서 물 색깔이 정말 옥 같은 파란색이었다. 어떻게 계곡에서 저런 색이 나오는 거지? 비가 오면 흙탕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어제저녁부터 16시간은 굶었는지라 루이스가 준 오렌지 반쪽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오렌지였다. 아구아술 주변은 우리나라 유원지 느낌이 물씬 나는데, 여기서 엠빠나다(Empanada)를 처음 사 먹었다. 군만두 느낌이다. 엄청 맛있다. 남미 배낭여행의 꿀재미 중 하나는 각 국마다 색다른 매력을 지닌 엠빠나다를 맛보는 것이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니 사람들이 수영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이틀은 샤워를 못 했기에 물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근데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그러자 손으로 쥐어짜는 제스처를 취하며 그냥 물에 들어가 보라는 루이스! 결국 들어갔다. 파란 물속에 풍덩! 너무 시원하고 좋았다. 이상하다. 나는 스페인어가 안되고 루이스는 영어가 잘 안되는데, 두 언어를 섞어가면서 엄청 재밌는 대화를 했다.)

이 아리따운 여자가 이탈리아 라부, 그리고 오른쪽이 루이스다. 나중에 루이스랑 얘기하는데 저 여자애한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 투어 다 마치고 작별인사를 할 때 이탈리아식으로 양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느낌이 뭐랄까, 그냥 신기했다. 미국에서 가끔 당했던 인종차별을 생각하며 백인들을 안 좋아했는데. 그래, 모든 백인들이 나쁜 건 아닌가 보다.

돌아가는 길, 공중화장실에 5페소를 내기 싫어서 참고 있다고 말했더니 루이스는 쿨하게 "내가 내줄게!"라고 한다. 아 차. 내가 또 이렇게 여행자 앞에서 돈 얘기를 했구나. 여전히 여행자로서 철이 덜 들었음을 느낀다. 투어를 마치고 터미널에 돌아오니 저녁 7시다. 그 앞에 타코가 1개 7페소 하길래 먹을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먹어보니 타코 안에 밥까지 들어간 스페셜 타코다. 지금까지 먹은 길거리 타코 중 최고였다. 3개 먹어서 21페소를 내야 하는데 1페소가 없어서 깎아주셨다.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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