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 보고타 (Bogota)
2015년 12월 30일
새벽 1시. 보고타 공항에 도착했다. 콜롬비아는 내가 가진 여행책에도 안 나와있다. 처음 밟는 미지의 나라다. 치안이 나쁘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걱정이 됐다. 이 시간에 인증 안 된 택시를 타는 것도 무섭다. 선택의 여지없이 공항 노숙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공항이 가장 안전하다는 이상한 믿음이 있다. 6시 반쯤 주위가 시끌벅적해서 눈을 떴다. 이제 어디서든 정말 잘 자는구나.
인터넷으로 봤을 땐 참 무서운 나라겠거니 했다. 외교부 여행지도에도 전국이 '여행유의, 자제, 철수 권고' 중 하나는 반드시 색칠되어있다. 안전한 지역만 다니긴 했지만 다행히 나는 아무 탈 없었다. 콜롬비아를 생각하면 친절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다. 몇가지 예화가 있다. 공항에서 황열병 예방 접종을 하러 갔다. (볼리비아 비자를 받기 위해 황열병 접종 증명이 필요했다.) 멍 때리고 앉아있는게 불쌍해 보였는지 어떤 아저씨가 문진표를 미리 써놓아야 한다며 종이를 직접 가져다주셨다. 나중에는 내가 잠들어 있으니까 혹시 예약 번호를 놓친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물어봐주기까지 하셨다. 하루는 버스 타고 시내로 이동하는데 어느 걸인이 올라탔다. 수공예라고 하기 민망한 어떤 물체를 팔았다. 자기 몸에 있는 끔찍한 흉터를 보여주며 적선을 요구하는 듯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버스 안의 대부분 승객들은 물건을 사거나 그냥 적선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한 내가 부끄러웠다.
보고타 시내는 여행자 혼자 다니기 위험해서 택시를 타라고 권장하던데 그러기엔 돈이 없다. 큰 맘먹고 버스를 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는데 웬걸, 버스카드가 없으면 승차가 안된다. Information 센터 직원에게 물으니 Almentario라는 초록색 공항 셔틀(무료)을 타면 포탈까지 가는데 거기서 카드를 구매할 수 있단다. 말도 잘 안 통하는데 그냥 비싼 돈 주고 택시를 탈 것인가, 포탈에 가서 부딪혀 볼 것인가. 고민할 것 없이 포탈이다. 친절한 매표소 직원, 시민들 덕에 포탈에서 무사히 카드를 구입, 충전하고 버스에 탔다. 여기는 기본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문화가 있나 보다.
보고타 구시가지에서 호스텔을 찾아 걸었다. 그라피티가 많고 꽤 퀄리티가 있다. 넋 놓고 보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능숙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파란색 표기는 한국어로 말한 부분)
"한국인이에요?"
"네."
"안뇽하세요, 만나서 반괍습니다. 어디 찾고 있어요?"
"오! 한국어 잘 하시네요. 호스텔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들어오세요. 지도 보여줄게요."
들어간 곳도 호스텔인데 '존'이라는 이 사람, 호객 행위가 전혀 없었다. 한국말도 조금 할 줄 알고 꽤 재치 있다. 그가 보여준 지도를 따라 여러 호스텔을 찾아봤으나 가격 대비 좋은 곳이 없기에 다시 존이 있는 호스텔로 돌아와 방을 잡았다. SAYTA라는 이 호스텔은 알고 보니 한국인 여행객들의 성지였다.
"돌아다녀보니까 여기가 제일 좋네요."
"잘 왔어요. 커피 마실래요?"
커피와 함께 한국인을 위해 특별 제작된 여행노트를 주셨다. 한국인 배낭여행자들 손에서 손으로 내려오는 정보집인데 보고타 돌아다니는 내내 유용했다. 여행하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은 내 손으로 추가해서 적고 다시 존에게 돌려주면 존이 또 다른 한국인에게 물려주는 그런 식이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한국인 전용 느낌이다. 이미 기거하는 3명 모두 한국인이다. 아무 눈치 안 보고 돌아다니는 해외여행 중에도 한국인들 앞에만 서면 왜 이렇게 소심해지는지 모르겠다. 방에 계신 분들이 모두 장기간 여행자 느낌이 나서 '내가 괜히 말 걸면 더 귀찮아하시지 않을까?'하는 눈치를 봐서 그런가 보다.
보고타는 하늘이 굉장히 맑았다. 매연이 많은 것 같은데 하늘이 파란 게 참 신기하다. 길을 따라가니 자연스럽게 볼리바르 광장에 도착했다. 사람보다 비둘기가 더 많다. 심지어 엄청 빠른 속도로 잘 날아다닌다. 사진 찍는데 무서울 정도다. 저녁에는 존의 조카 다니엘라가 추천해 준 맛집에 갔다. 'Donde Frecho'라는 가게에서 콜롬비아 전통 음식 Arepas를 먹었다. 두꺼운 또띠야 안에 속재료를 넣어 샌드위치처럼 먹는 거다. 가장 비싼 꼰또도(모든 재료)를 골랐다. 아, 비싸 봐야 2000원이다. 새우, 과일, 햄, 소고기, 닭고기, 계란, 메추리알, 버섯이 말 그대로 다 들어간다. 배가 터진다. 아쉬운 점이 딱 하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새우는 좀 밑부분에 킵해둬서 아껴 먹고 싶은데 그게 안된다. 위에부터 차근차근 먹어야 한다.
2015년 12월 31일
사이타 호스텔의 주인 존과 친해지면 아침 장 보러 갈 때 같이 갈 수 있다. 그러면 콜롬비아에만 있는 특이한 노점상들을 데려다주고 길거리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함께 아침을 먹은 사람들도 다양하다. 계란과 바나나를 빻아 샐러드를 해 먹은 캐나다 할아버지. 남미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셨다는데 그 나이에도 체력을 유지하며 이런 고난도 여행을 하는 것이 신기하다. 이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서 에콰도르 바뇨스에서 액티비티를 하고 싶다. 영국인 커플 던킨과 캐시를 보면 영국 신사 느낌이 물씬 난다. 또 미국인 사라와 그 친구 타이완-아메리칸 에반까지. 오늘은 이 둘과 동행하기로 했다.
나, 에반, 사라. 우리는 아무 계획 없이 보고타 시내를 돌아다녔다. 골목골목이 너무 예쁘다. 괜찮은 풍경이 있으면 사진 찍고 배고프면 밥 먹고 그런 여행을 했다. 어딜 꼭 빨리 가서 뭘 보고 이런 건 없었지만 그냥! 콜롬비아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길거리에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공원에서 색소폰 소리를 들으며 오후를 보내기도 하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면 별거 없는 곳도 좋게 변하나 보다.
여행 중에 일정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려면 심사숙고를 해야 한다. 그치만 그건 참 길고 귀찮은 과정이다. 그래서 최선이 아닌 그냥 끌리는 대로 결정을 내린다. 그럼 결과를 탓할 수가 없다. 가보니 재미없으면 결국 준비를 게을리 한 나의 선택이니까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결과가 좋으면? 자축하면서 그 순간을 더 뜻깊게 누리면 되지 뭐.
콜롬비아 밥 요리는 짭짤한 것도 있고 내 입맛(한국인의 입맛..?)에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수프에 들어가는 '고수'에만 적응된다면 말이다. 처음에는 고수의 역한 냄새 때문에 국물 요리에는 손을 못 댔다. 조금 적응되니 수프 위에 얹은 고수를 덜어내고 먹었다. 남미 여행이 끝날 때쯤에는 "고수 없이 남미 수프를 논할 수 없지!"라며 그릇을 싹싹 비운 기억이 난다. 그 향을 모기가 싫어해서 모기 퇴치를 위해 고수를 먹는다던데 이거 원. 모기만 싫어하나. 사람도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