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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사녀ㅣ이혜진OT Jan 18. 2019

영케어러(young carer)의 삶

사랑스러운 나의 짐

  아빠는 2010년 62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할아버지가 되었다. 쓰러지기 전부터 여기자기 아픈 곳이 많았다. 수술이 필요하지 않은 병도 있었으며, 수술이 필요한 병도 있었다. 막일로 술과 고된 육체노동을 견뎌내며 꽤 긴 시간 살아오셨으니, 아프지 않은 것이 신기할 일이다.


사랑스러운 나의 짐


  작업치료를 배우는 과정에서는 해부학, 생리학, 의학용어 등 기초의학을 배우게 된다. 대학 1학년 내가 병리학을 배우는 학기였다. 그 수업 과정에서 간(liver)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그 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와서 아빠를 보는데 자꾸 수업시간 배웠던 간경화의 증상이 떠오른다. 일주일 전부터 소화가 안된다며 소화제를 드시기도 하셨고, 제일 특이한 증상은 흰 눈동자 부분이 누렇다. 그러고 보니 아빠의 피부도 누렇다.


아빠를 보는데 자꾸 수업시간 배웠던 간경화의 증상이 떠오른다.


  다음날 나는 아빠와 함께 동네 의원으로 가서 소견서를 받아, 종합병원으로 갔다. 의사 선생님은 아빠를 보자마자 피검사를 의뢰하였고, 피검사 수치가 나오기도 전에 입원권유를 하셨다. 피검사 수치에서는 간경화의 직전까지 염증 수치가 높다고 하셨다. 이대로 염증 수치를 두었다가는 간경화로 진행될 수 있으니 바로 아빠를 입원시켰다. 아마 그때 병원을 가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간경화로 생을 마감하셨을까? 그럼, 뇌졸중이란 것도 오지 않았을 테고 좀 더 편하게 생을 마감하셨을까? 문득 그 날을 회상하니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다음 해, 자꾸 왼쪽 어깨가 아프시다고 한다. 나는 학교에서 흔히 배웠던 오십견인가 싶었다.


아빠! 그거 나이 들면 생기는
어깨 아픈 병이니깐,
정형외과 과서 약 먹고 물리치료하고 해야 돼.
나 오늘 학교 가야 하니깐, 낮에 병원 갔다 와요.
또 갔다고 거짓말하지 말고, 병원 가면 전화해.
의사 선생님과 통화할 테니깐 알았지?
꼭 가야 해.


  나의 아빠는 딸의 말은 엄청 잘 듣는다. 그렇게 정형외과를 갔는데 정형외과에서 소견서를 적어주더란다. 좀 더 큰 병원에 심장내과로 내원하라며 적어주셨다. 그렇게 아빠는 심장동맥에 문제가 생겨 심장 우회수술을 하셨다. 기억에는 꽤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이 것 또한 늦었다면 위험했다.

좀 더, 큰 병원에 심장내과로 내원하라며, 적어주셨다.


  수술은 잘 마무리되어 아빠는 건강하게 퇴원하셨다. 입원과 퇴원, 수술 모두 나는 실습기간이었기에 아버지 곁에 있어 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혼자 움직일 수도 있었으며, 대소변과 식사는 독립적이었으니 보호자가 크게 필요하지는 않았다.


  심장 우회수술을 잘 마무리하였으나 문제는 심장이 아니다. 심장수술을 하기 전 여러 가지 검사를 하게 된다. 검사 도중 아빠의 목동맥이 막혀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른쪽 목동맥 중 뇌로 혈액을 보내는 속목동맥이 거의 막혀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빠는 심장 우회수술을 끝나자마자 대학병원으로 이동하여 속목동맥에 스텐트 삽입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대학병원에서 스텐트 삽입을 할 동안은 실습기간이 끝난 시기여서 직접 아빠를 간병할 수 있었다.


  이 수술 과정은 머리 부분을 절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작은 수술은 아니다. 수술이 끝나고 아빠는 의식 없는 채 회복실에서 병실로 올라오셨다. 붕대를 머리에 감고 있었기 때문에 상처를 잘 확인하지 못했지만, 드레싱 과정에 상처를 보니 15cm 절개가 되어있었으며, 아빠의 머리는 굵은 스템플러로 봉합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상처보다 아빠의 수술 후 쇼크 증상이었다. 수술 후 의식을 차리고 난 아빠는 다른 사람이었다. 갑자기 화를 내고 주사를 뜯어내고 머리에 붕대를 풀고 난리 난리 온 병원을 발칵 뒤집어 놓으셨다. 그렇게 3일을 쇼크 증상으로 다른 사람처럼 굴며 술 취한 사람처럼 행동하더니 3일이 지나니 거짓말처럼 돌아오셨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간혹 수술 후 쇼크 증상으로 이런 행동을 보이시는 분이 계신데 아마 며칠 지나면 회복하실 거란다. 진짜 그 말이 맞았다. 아빠는 3일 동안의 기억을 전혀 못하셨고 다시 나의 아빠로 돌아왔다.   


  간경화 초기, 심장 우회수술, 스텐트 삽입술까지 이 정도 하셨으니 이제 그만 아프시겠지 했다. 이미 엄마와 나는 아빠의 병으로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지칠 만도 하지 제일 지치는 것은 아빠의 잦은 병원생활 때문에 간병생활이 지친 것이 아니다. 입원과 퇴원, 수술을 반복하면서 발생한 병원비는 정말 걷잡을 수 없었다.


  최근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가 있다.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이다. 극 중 혜나가 엄마의 병원비를 걱정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의 감정이 다시 살아나 남편 몰래 훌쩍인다고 혼이 났다.


  대학병원의 병원비는 만만치 않았다. 국민건강보험이 가입되어 있어도 뭐가 그리 비급여 항목이 많고 비급여 주사제와 약이 많은지, 우회수술 2주째 수술비와 함께 천만 원 정도의 병원비가 청구되었다. 당장 집 보증금도 그 정도 안되는데 천만 원이 어디 있을까? 조심스레 원무과 직원에게 병원비 분할납부가 되는지 물어보았다. 학생 같아 보이는데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니 걱정이 되었는지 아빠의 성함을 검색 후 대학병원 사회복지사와 상담을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솟아날 구멍

  그래,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한국 심장재단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비용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수술비와 비급여 항목 몇 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한국 심장재단은 나에게는 하나님 같은 존재였다.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아빠의 건강이 회복하는 것을 지켜보고 나는 빠르게 취업을 했다. 건강해졌으니 또 아프시겠냐는 마음으로 의정부로 멀리 도망가듯이, 취업을 했다.

 

  사실 빠르게 취업을 했지만 집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아빠가 제일 걱정이었다. 그 당시 영상통화 비용이 비싸지만 가능하였기에 나는 매일 아빠와 출근 전, 출근 후 영상통화를 했다. 쓰러지는 그날 역시 출근 전 영상통화를 하였다. 말하는 것이 어눌해 보여 왜 그렇게 말을 어눌하게 하냐고 다그치니, 아빠는 사탕을 먹고 있어서 그렇다고 하셨다. 나는 단순히 사탕이겠거니 하고 저녁에 전화를 하겠다 하고 끊었다. 아빠의 뇌경색 증상은 쓰러지는 그날 오전부터 진행되었던 것이다.


  한 참이 지난 저녁에 발견하였으니 뇌경색의 골든타임은 지나버렸다. 한참 후 엄마 말에 의하면 그날 아빠가 물 잔을 들고 거실에서 걸어오는 걸음걸이가 매우 비틀거렸다고 한다. 어젯밤 소주를 몰래 먹었나 하고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출근을 하셨단다. 대수롭게 생각을 하고 오전에 병원을 갔더라면.....  


  아빠는 사랑스러운 나의 짐이었다. 뭐가 그렇게 아빠를 좋아하게 했는지 모른다. 이유가 있겠는가? 아빠니깐...  


  나의 20대는 이 사랑스러운 짐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 내 밑으로 자녀가 두 명이 생기고 생각하니, 아빠의 삶에서도 나는 아빠의 사랑스러운 짐이었을 것이다. 아빠도 나를 지켰으니, 이제 내가 아빠를 지킬 차례다. 우리의 삶은 서로의 짐들이 모여, 버팀목이 되고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아빠는 사랑스러운 나의 짐이었고, 나는 그 짐을 지키기 위해 힘을 냈다.


아빠는 사랑스러운 나의 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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