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사녀ㅣ이혜진OT Mar 14. 2019

아빠의 딸이 결혼하기까지...

헤어져야 할 시간

아빠!! 잘 잤어?

아빠!! 갔다 올게.

아빠!! 나 출근합니다.

아빠!! 엄마랑 싸우지 말고, 잘 있어요. 빨리 올게.

아빠!! 나 진짜 간다.

빠빠이. 손 흔들어 줘야지.  빨리!

오구오구 잘하네 우리 아빠. 진짜 갑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빠.

  나는 아빠에게 보호받는 딸이 아닌, 아빠를 보호하는 딸이었다. 작은방에서 눈을 뜨고 나면 아빠를 확인했고,

출근 준비를 끝내고 항상 같은 인사말을 여러 번 했다.


출근길 인사가 뭐가 저렇게 길었을까.


  쓰러지신 후 1년 가까이 병원에서 지내고 나니, 우리 집 형편에 감당하기 힘든 병원비와 집이 있어도 들어가지 못하는 엄마와 나. 간병을 해야 하는 엄마. 그 간병을 하는 엄마를 보살펴야 하는 나.

  엄마와 나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다.


  그래. 집에 가자!

  사실, 아빠를 집에 모시고 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시기에 아빠는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 집에 가자 !!

  추석 명절이 다가오고 있었을 때다. 보통의 재활병원에서 휴일은 일대일 재활치료가 없다. 일대일 재활치료가 없다는 말은, 환자와 치료사가 단 둘이 만나 치료하는 시간이 없다는 말이다. 그럼 휴일에는 보통 그룹치료 등 기구를 이용한 환자와 보호자가 해야 하는 셀프 치료 등이 있다.

  그래 치료도 없는데 그럼 연휴에 집에 데려가 보자. 그렇게 우리 가족은 1년 만의 함께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집은 뇌병변 1급, 노인장기요양등급 1급의 아빠를 돌보기에는 매우 부족한 환경이었다. 전동침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 침대도 없었으며, 아빠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이라고는 텔레비전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은 굳이 집에 가서 연휴를 보내겠다고 고집부린 이유는, 집에가고 싶은 아빠의 욕구보다는 연휴 동안 나와 엄마가 집에서 쉬고 싶은 욕구가 더 컸기 때문이다. 집에서의 아빠는 마음은 편했을지 몰라도 몸은 더욱 불편했다.


  아빠는 입으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연하장애가 있으셨고 흡인성 폐렴으로 여러 번 대학병원 응급실을 들락날락하셨다. 연하장애가 있는 환자는 우선 영양공급을 위해 NG튜브를 하게 된다. 코에서 위까지 연결된 얇은 관(호스)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하게 된다. 그 관에는 일반적으로 뉴케어라는 영양분이 가득 담긴 캔을 부어서 위로 음식물을 보낸다.


  집에 간다면, 아빠는 콧줄(튜브)을 하고 있었기에, 베지밀의 색깔과 농도를 가진 뉴케어란 캔으로 된 음료로만 식사를 하실 수 있다.


  흡인성 폐렴으로 인해서 인지 아빠는 가래가 끊이지 않으셨다. 아마도 50년이 되도록 넘게 핀 담배가 원인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긴 가래는 석션을 통해서만 배출할 수 있다. 병원에 설치된 석션기를 통해 매시간마다 가래를 배출해야지만, 편하게 쉴 수 있고 잠을 주무실 수 있다. 아빠는 침을 삼키면서도 기침을 자주 하는 고위험군의 연하장애 환자셨다.


  집에 간다면, 석션기가 없는 집에서 아빠는 가래로 힘들어할 것이 눈에 선했지만, 엄마와 나는 쉬고 싶은 욕구 하나만으로 두리발(부산시 장애인 콜택시)을 불렀다.


  병원에는 이틀 외박 신청을 하고 그렇게 집을 나섰지만, 우리는 하루를 겨우 보내고 다시 병원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석션기를 대신해 아이들의 콧물을 빼주는 기구를 약국에서 구매한 후 사용해보았지만, 거대한 가래 양은 이 작은 기구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 모녀는 가래만 잡히면 집에 올 수 있겠다는 희망과 큰 자신감을 얻었다.


그렇게  몇 번의 외박 끝에, 우리는 주 3회 외래치료를 받겠다는 계획하에 퇴원을 하였다.


엄마와 나는 정말 기뻤다. 병원이 아닌 내 집에서 잠을 자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큰 행복인가 싶었다. 

엄마와 나는 정말 기뻣다.

  퇴원 준비를 하면서 장기요양등급 신청도 하고 전동침대 및 목욕의자 등 집에 필요한 복지용구 물품을 대여하거나 구매하였다. 그렇게 아빠와 엄마, 나는 집에서 예전처럼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퇴원하고 집에 온 날 작은 파티를 했다. 드실 수는 없지만, 케이크에 초도 꼽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아빠가 쓰러지신 이후로는 나의 미래의 남편이 될 사람을 상상하게 되었다. 상상보다는 생각했다가 맞지 싶다. 아빠를 봐도 놀래거나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항상 걱정이었다.

  

  그렇게 2년 정도 흘렸을까? 지금 남편을 만났다. 지금 남편은 색깔로 치면 초록색 또는 노란색 같은 봄의 색을 가진 남자였다.

  우리는 스마트폰이 이어준 사랑이다. 그 당시 유행하던 어플인 1k와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가 이어줬다. 1년 정도 sns 친구로만 지내고 서로의 게시물의 댓글을 달며 좋아요를 눌러 주었다.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 여자 친구도 있었으며, 그 여자 친구는 꽤 이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해 태풍이 왔다. 태풍의 이름은 볼라벤.  엄청 큰 태풍이라고 했지만, 경남지역의 태풍은 시시하게 도망갔다.


  다른 날 같으면 엄청 꾸미고 나가는 출근길이지만, 태풍이 온다는 그날만큼은 쌩얼에 재활용센터에서 받은 찢어진 큰 우산을 들고 신발은 오천 원 주고 산 슬리퍼를 신고 출근을 했다.


  태풍이 불기 한 달 전 남편은 전 여자 친구와 헤어졌는지 남편의 sns에서는 그 여자를 찾을 수 없었다. 쯧쯧, 그래 헤어졌나 보다 하고 서로 좋아요를 눌러주고 했는데, 나의 sns에 남편의 댓글이 자주 달리더니 적극적으로 변한다.

급기야, 날이 더우니 팥빙수를 같이 먹자며, 만나자고 한다. 그런데 나도 싫지는 않았던지, 댓글도 받아주고 인사도 하며 답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중 태풍이 온 것이다.


  태풍이 시시하게 간 그날 오후도 남편은 태풍도 이렇게 시시하게 갔으니 오늘은 꼭 팥빙수를 먹자고 한다. 아마도 술을 한잔 하자 했으면, 만나지 않았을 거 같다. 오후 6시에 만나 팥빙수를 먹자니, 그래 심심한데 팥빙수나 먹지 싶어 퇴근 후 그대로 쌩얼에 슬리퍼에 허름한 원피스 차림으로 남편을 만났다.


  우리는 sns상에 셀카와 사진으로만 1년을 봐왔기에 서로에 대한 이미지가 있었다. 내가 본 남편의 이미지는 작은 키에 그 당시 흔하지 않은 콧수염과 얍삽하게 생긴 외모였다. 한마디로 엄청 놀게 생긴 남자로 보였다.


  남편이 본 나는 적어도 170의 키에 늘씬하고 이뻤단다. 사진빨인 줄도 모르고 1년을 그 사진에 속아 연락을 했던 것이다. 남편의 이상형은 큰 키에 시원시원한 고준희 같은 여성상이다. 나를 아는 사람은 풋 하고 웃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진짜 저녁만 먹고 헤어지려고 했던 남자와 지금 결혼까지 했다.


지금 결혼까지 했다.


  그 남자를 처음 만나고 인사를 나눈 후 몇 마디의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참으로 미안해졌다. 이렇게 밝고 반듯한 남자를 외모만 보고 색안경을 꼈으니, 그리고 작은 키인 줄 알았는데 한참을 위로 올려본 180의 키였다. 알고 보니, 이 남자의 sns 사진에는 유독 같이 찍은 사진이 많은 친한 지인이 있었는데 그 지인의 키가 190이었다. 옆에 있는 남편이 작아 보였던 것이 이해가 갔다.


  그렇게 좋은 이성친구가 생긴 거 같은 기쁜 마음으로 이 남자를 몇 번 만나다 보니 하동우라는 남자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를 돌보면서 힘들었던 내 마음이 이 남자의 초록색과 노란색이 나를 치료해주고 있었다. 만나면 엔도르핀이 생기고 웃고만 있는 내가 보였다.


초록색과 노란색이 나를 치료해주고 있었다.


  우린 9개월 연애 끝에 1년 되던 날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이 남자와 결혼을 결심하면서 만나게 된 것은, 정식으로 만나자고 한 지 일주일도 채 안되었을 때 아픈 아빠가 있는 집으로 갑자기 데려갔을 때이다. 그때의 표정과 행동이 꽤 멋있어 보였으며, 평상시 나와 지인들에게 배려하는 모습에 이 사람과의 결혼생활 속 힘든상황이 오더라도 견딜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치 않다. 나에게는 과분한 남자이고, 지금도 나는 이 남자의 엄청난 기운을 받으며 힘을 낸다.




  그렇게 결혼을 준비하던 중 아빠는 알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하며 끙끙 앓으셨다. 대학병원 응급실을 많이 가본 우리는 괜히 고생만 시키실 거 같다는 이유로 119를 불러 종합병원 응급실에 갔다. 통증의 이유를 모른 채 그저 반복되는 폐렴일 것이다 싶어 입원을 했다.


  이번에는 보통의 신음소리가 아닌 극도로 아파하는 모습이다. 나는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 판단하여 급하게 대학병원 응급실로 이틀이나 지나서야 가게 되었다.


극도로 아파하는 모습이다.


  대학병원에서의 진단은 급성담낭염이었다. 그랬으니 이렇게 아파하셨지.. 말도 못 하시니 얼마나 아픈지 표현도 제대로 못하시고.. 아빠에게 너무 미안했다.

  응급 수술을 해야만 한단다. 그러나 아빠는 위험한 요소를 다 갖고 있는 환자셨고, 보통 건강한 사람이라면 복강경으로 가능하지만, 심장 우회로 수술을 한 사람은 복강경을 하기 위해서는 배에 가스를 주입해 부풀게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오히려 심장에 무리를 줄 수 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15센티가량 개복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정말 위급한 상황이라 지금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때의 시간이 새벽 2시다.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수술 도중 아빠의 생명이 위독할 수 있는 비율은 90퍼센트라고 한다. 수술을 안 해도 위독하고, 해도 위독하면 해야 하지 않을까?


  다행히 수술은 잘 마무리가 되어 아빠는 입원 치료를 하게 되었다. 건강한 사람은 담낭염 수술쯤이야 빠른 회복을 하시겠지만, 아빠는 성한 곳이 없는 분이시다. 회복실을 나오지 마자 중환자실에 일주일을 계셨고, 대학병원에서 3달을 치료를 받으셨다. 대학병원 치료 중 나의 결혼 날짜가 다가왔다.


  예정 대로라면 아빠는 집에 계셨을 것이고, 하나뿐인 외동딸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함께 준비를 하고 결혼식에 참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빠의 상황은 욕창과 수술 후 합병증 폐렴과 패혈증까지 의심하는 39도의 열이 오르는 지금 상황이 하필 내일 딸의 결혼식이다.


  나는 비록 아빠가 아프지만, 내 결혼식에 아빠의 휠체어를 밀고 들어가더라도 같이 가고 싶었다. 병원에 사정을 말했으나, 위험해서 절대 안 된다는 말뿐이다.


  다음 날 새벽 나는 메이크업 등 결혼식 준비로 분주할 때 엄마는 병원에서 아빠를 데리고 몰래 나올 계획을 하고 계셨다. 결국 간호사에게 붙잡혀서 외출을 허락하지만, 환자가 잘못되었을 시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적고 아빠를 모시고 올 수 있었다.

  아빠의 결혼식 참석은 007 작전처럼 스펙터클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결혼식 가족사진을 보면 아빠의 표정이 매우 멍하고 마르셨다. 이후 아빠에게 물어보았지만, 결혼식 중간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실제로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아빠는 요양보호사 이모의 도움으로 구급차를 타고 급하게 병원으로 가셨다.  


  그 날 아빠가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셨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훗 날 내 자식의 결혼식에도 후회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아빠도 함께해서 좋았다고 표현하셨다. 아빠가 잘 견뎌주었던 그날의 추억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2013년 9월 28일

아빠의 표정이 매우 멍하고 마르셨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케어러(young carer)의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