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2016년 12월 15일 Am 12시
안녕하세요. ○○병원입니다. 이재봉 씨 따님이시죠? 지금 아버지께서 위독하십니다.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이제 4살이 된 아들과 5개월이 된 딸이 곤히 자고 있을 시간이다.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엄마에게 아이들을 맡긴 채 그렇게 아빠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 급히 나섰다.
아빠의 위독하다는 전화와 위험한 상황은 아빠가 쓰러지신 후 여러 번 겪었던 일이라 크게 놀라지도 않다. 그러나 이번에는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정말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저녁 장사 중인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린 후, 콜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아빠가 있는 요양병원의 중환자실에는 간호사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보인다. 요양병원의 중환자실이란, 대학병원의 중환자실이 아닌 거동이 불편하고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침상 환자들이 모여있는 병실이다. 보통 간호사실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위험한 상황이 발생 시 빠르게 처치가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조심스레 아빠에게 다가갔다. 사랑하는 나의 아빠는 나를 기다렸던 거 같은데, 금방 5분 전 눈을 감으셨다고 아빠가 아닌, 간호사가 말을 한다. 임종 직전에는 실어증이 있는 뇌졸중 환자들도 말씀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던데, 나는 그 기회마저도 놓쳤다. 아직도 아빠의 손과 발이 따뜻하다. 당직 의사는 사망선고를 하고 신고서를 작성해주겠다고 한다. 이렇게도 편하게 아빠를 보낼 수 있었는데, 아빠를 보내기 싫었다.
심폐소생 거부 (DNR, Do Not Resuscitate)
DNR 동의서에 싸인을 한 지 2달쯤 지난 후 아빠는 그렇게 쉽게 저 강을 건너실 수 있으셨다.
아빠가 아픈 동안 우리 가족은 집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을 제집처럼 다녔다. 나는 지금도 그 병원의 응급실을 가면 아빠와의 힘들었던 기억이 다시 살아난다. 대학병원은 괜히 대학병원이 아니다. 아빠는 위독한 상황 즉, "오늘을 넘기지 못하실 거예요."라는 말을 수없이 의료진에게 들었다. 급하게 구급차를 타고 대학병원 응급실을 가게 되면, 짧게는 하루 길면 일주일 다시 컨디션을 회복하셨다.
대학병원은 입원실도 없는 경우가 많다. 엄마와 나는 응급실에서 편의점 박스 위에서 간단한 끼니를 때우고, 잠을 자며, 그렇게 3일을 지내기도 했다. 전염성이 있는 VRE(반코마이신 내성 장알균 감염) 덕분에 응급실 격리실에 이틀 꼬박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VRE는 노인환자, 면역 기능 저하 환자, 장기간 입원으로 향생제 치료를 받은 환자에게 보통 발생하게 되는데, 아빠는 이 모든 사항에 해당된다.
아빠는 와파린 약을 장기 복용한 환자이다. 태생적으로 약한 피부이기는 하나, 와파린의 영향으로 종이장처럼 얇은 피부로 변했다. 수액 투여 및 혈액 검사를 위해 혈관을 찾으려면 혈관이 보이지 않았다. 연차가 높은 간호사들이 여러 번 와서 시도를 했지만 실패할 경우가 다반사였다. 급할 시에는 할 수 없이 심정맥에 긴 꼬챙이 같은 바늘을 넣는 시술도 여러 번 했다. 종이장처럼 얇아진 피부는 흔히 응급실에서 사용하는 의료용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내면 테이프와 아빠의 살결이 같이 떨어져 피부가 얇게 벗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자극 없는 테이프를 따로 구매하여 들고 다니며, 수액을 해야 한다면 이 테이프를 사용해달라고 간호사들에게 부탁했다.
위독하다. 위험하다. 할 때마다 나는 사설 구급차를 타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대학병원 응급실은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짧으면 3시간, 길면 며칠 걸리는 것을 아는 우리는 일반 종합병원 응급실을 가기도 했지만, 종합병원에서는 과거 병력이 많은 아빠가 겁이 났던지, 바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라며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신기하게 아빠는 그때마다 기적처럼 다시 살아나셨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응급실에서는 오늘 밤이 고비시고, 내일을 넘기시기 힘들다며 준비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때 풀타임으로 대학원 박사과정 중이었고, 그 당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본부가 원주지만 그 당시에는 서울 마포였다. 그 뒷날 프로젝트의 계약건으로 서울을 가야 한다. 당장 아빠가 위독하다고 하는데 그 계약건을 위해 대신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필요한 서류 등 도장도 모두 내가 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내가 가야 하고 내가 끝내야 하는 나의 일이기에 책임감 하나로 새벽 첫 비행기를 타고 다녀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 이렇게 쉽게 가실 분 아닌 거 알잖아.
아빠 나 일 때문에 서울 갔다 와야 되는데, 그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의식은 없지만, 눈을 감고 기다리겠다고 웃으시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서울을 다녀올 동안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입원실이 생겨 3일 응급실에서 대기 후 입원 치료를 할 수 있었다. 아빠는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급속도로 좋아지셨고, 퇴원 후 예전에 계셨던 요양병원으로 돌아왔다. 사실, 요양병원에서는 기쁘게 맞이해 주진 않았다. 까다로운 보호자와 많은 과거 병력이 있는 시한폭탄 같은 환자가 다시 돌아온다는 게 의료진의 입장으로는 크게 반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양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간호사 선생님께서 조심스레 나를 부르며 DNR 동의서에 대해 설명하며 알려주신다.
아빠는 늘 대학병원으로 갈 때마다 나보고 가지 말자는 눈빛을 보내셨다. 그것은 본인이 힘들어서 그랬을까? 하며 추측도 해보지만, 본인의 몸보다는 나와 엄마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있기 힘드셨을 거다. 그러나, 나는 아빠가 제일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픈 사람이 제일 힘들다. 보호자도 물론 힘들지만 아픈 본인이 제일 힘들고 마음 아프며 견디기 힘들 것이다.
엄마에게 DNR에 대해 설명하니 동의하신다. 이제 그만 힘들게 하고 아빠를 보내주자고 하시는 엄마에게 다 알면서도 딸은 화를낸다. 아빠가 지금 당장 돌아가시는 것도 아닌데 나는 서명을 하면서도 눈물을 훔치느라 힘들었다. 그 서명을 하고 나면 아빠는 곧 강을 건너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으니 말이다.
엄마가 아빠에게서 느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아빠에게서 느꼈던,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애써 모른 척하고 싶다.
동의서를 작성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빠는 그렇게 쉽게 강을 건너시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셨다. 아빠를 돌아오지 못할 강에 건너게 한 사람은 나라고 엄마에게 말한다. 그동안 그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한 사람도 나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돌본다는 건 인생의 순간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 아빠를 진심으로 돌보던 그 순간을 기록하고, 간병이 힘든 것만이 아니란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내 인생에서 빛날 수 있는 기회가 또 온다면, 나는 기꺼이 그 순간을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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