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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Apr 29. 2019

할아버지, 거짓말하지 마세요

다섯 살부터 여든네 살 까지.

밤 10시 30분이 넘었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주무시기 약 30분 전, 오늘은 괜찮겠다는 느낌으로 집이 들어갔다.


"끼이익"하는 대문 여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 방, 문 앞에서 어김없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호냐?"


"네, 저 왔어요."

하고 나는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당이 오르셨는지 얼굴이 약간 붉으셨다.

소주도 한 잔 하신 듯, 텔리비전 앞에 반쯤 남은 초록색 소주병 하나도 놓여져 있었다.


거실과 이어져 있는 할아버지 방 문을 열고 인사를 드렸다.

내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에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내 이야기 좀 들어봐, 오늘은 좀. 맨날 어딜 그렇게 급하게 들어가. 나는 집에서 너 오기만 기다렸는데"

속으로 "저는 기다리지 않았는데요?"라고 반문하긴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여기서 또, 우리 둘 사이의 차이점이 떠올랐다.

독거노인과 독거청년의 차이점이었다.

나는 최소한, 나의 부모님이나 누나와 형, 거기다가 지금 내 앞에 있는 할아버지까지 나를 기다려주지만

독거노인을 기다려 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독거청년은 혼자가 되고 싶어 했고, 또 한 번의 변신을 거듭해 관심을 끌어오길 기대했지만

독거노인은 어쩔 수 없이 혼자가 되었고, 더 이상 변신을 할 여력도 없었다.

나도 더 이상 무엇인가 배우거나, 될 마음이 사라졌을 땐, 혼자가 될 수밖에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고 난 후, 괜히 마음에 찔렸지만

마음에 찔리기만 했을 뿐

난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것이 내 양심이더라도, 나는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기다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설사, 이 마음으로, 내가 독거노인이 될 벌을 받을지라도.






어머이 돌아가시는지 알도 못했어

그래서 우리 어머니, 너한텐 증조 할마이고, 그래 가지고 38선 그 소리를 듣고서 넘어올 수도 없고

38선이 이렇게 가로막혔는데 오겠어?


한 80명씩 짤리는겨, 한 사람 넘겨주는데 논 3마지기 값이 들었어,

그래 가지고, 이모부가 돈을 다 내줬대


집이라고 도내를 가니께, 그 밑에 동네가 내가 난 고향이고 거기가 최가네가 많이 살아

가까운 집안들 그 밑에 동네 우리가 다 거기 최가여, 경주 최가지만, 거기가 본토박이라


그래 가지고 와서 보니까. 구미가 사는 사람이 작은아버지인데

 그가 구미 가서 죽었지마는

그가 우리 집을 차지하고 있더라고

집이라고 오두막집 같은 것을 차지하고 있고


그래서

어머이 죽고, 아버지 죽고

와서 보니께 텅텅 벼가지고 다 죽었어




할아버지의 기억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이야기는 뒤죽박죽이었다. 북한으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니 할아버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한테 증조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고

살던 집도, 구미 사는 작은 아버지가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셨다.

그 어렸을 적에, 북한에 누구랑 갔는지 궁금해서 내가 물었다.



"북한은 누구랑 간 거예요?"


일본하고 미국 하고 2차 세계 대전 때, 미국 비행기가 이북서 폭격하고 여기다도 폭격을 하니께

일본하고 미국 하고 싸웠어 그때.


그때 외갓집으로 피난을 보냈어, "외갓집이 산골이니까 도내로 가거라" 

이렇게 해서 그렇게 먹을 것도 없고 버는 사람도 없고 외갓집이라고 와가지고서 둘이 여기로 피난을 왔어

나한테 큰누나하고 작은누나하고

근데 지금 다 살아 있어, 수원 살아, 칠보산 기도원이라고



사촌누나 두 명이, 할아버지가 살던 영동으로 피난을 왔고

이북의 산골에 사는 사촌에게 연락이 닿아

사촌 누나들과 이북으로 피난을 갔다는 얘기셨다.




조금 더 구체적인 상황 파악을 위해, 하나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증조할아버지는 어딨었는데요? 북한 갔을 때"


죽었잖아 아버지는, 어머니는 살아 있는 것을 보고 갔는데

그러니께 우리 집으로 피난으로 왔다가 이북으로 다시 피난을 간 거야

와가지고 6개월인가 있더니, 평양에서 오라고 편지가 왔어. 도내로


그때는 편지로 연락이 힘들 땐대 왔더라고

그래 가지고 와서 있는데, 간댜

그래서, 나는 6개월 동안 정이 들었어

누나들 가면 나도 따라간다고

누나들 따라갔어


그래서 어머이가 그랴

어머이가 아부지 죽고, 증조 할아버지 죽고, 나는 살아 있었다고

어머니는 살아 있었다고


어머니가 뭐라 하냐면, 신천이라고 있지 도내 가는 길에

거기를 이렇게 데려다주면서, 거기 가야 차를 타 평양 가는 거를 , 경부선


누나들 가면 나도 따라간다고 하면서 어머이 치마를 붙들고 울었다고

가지말라는겨, 그래서 나를, 나는 갔어

이북을 가는데 어머이가 "너, 세 밤만 자고 와" 할머니가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래요" 내가 말했지.


그러더니 신천역에서 어머이가 참외 세 개를 사서 큰누나 작은누나 나한테 줬어.

그래 가지고 이북을 갔더니, 세 밤 자고 오라더니 가는데 3일이 걸려.


3일을 걸려 나흘 째 되는 날에 38선이 가로막혀서 나오지도 들어오지도 못한데

그래서 거기서 2년을 있었어.




"세 밤만 자고 와"라는 증조할머니의 말도

"그래요"라는 할아버지의 말도

이렇게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할아버지가 증조할머니랑 같이 영동에 남았다면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또 다른 양상으로 흘렀을 것이다.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아마 이 시기는 1945년 9월 경일 것이다.

할아버지의 당시 나이가 8살 이라고 하나 할아버지의 착오라고 생각된다.

할아버지의 현재 나이는 84살, 그렇다면 출생년은 1935년이다.

할아버지가 이북으로 가셨던 것이 실제 8살이라면

분단선은 43년이어야 한다. 허나 이는 기록과 다르기에

할아버지가 이북으로 올라갔을 당시의 나이가 10살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2년을 살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할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12살이 된다.




8살 먹어서 갔는데 10살 가을에 넘어왔다고

그래서 11살에 국민학교를 들어갔는데

막 그때 그러더라고, 일로 넘어왔는데 

구미 사는데 나한테 작은 아버지가, 엄청 머시여


내가 정신이 없어서 말을 잘 못혀

그래서 나보고 나무를 산에 가서 해오라는 거야

그래서 아랫도네, 거기가 고향이니께 

작은아버지라는 사람이 나에게 지게 주면서 나무 해오라면서 시키더라고


그래 가지고 나무를 해가지고 오면

끙끙거리고 한 짐 해오면, 고맙다 하면 되는데

이걸 하는 걸로 해왔냐고, 작게 해왔다 이거여 

나는 내 딴에 많이 해왔는데, 부엌에 불 땔라고


뭐 그것도 한두 번이여, 

도저히 못살것어

그래서 외할머니 댁에 갔어

그래서 글로 가서 보니까, 외삼춘 하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세 식구 살어

외손자니 나는

거기서 산다고 내가 늘러 붙었어.

그러니께, 살라는겨

그래서 소 내가 다 맥이고, 나무도 내가 다 해다 놓고

그래서 거기서, 1년을 11살 먹어 거기 가서 18살 먹도록 살았어. 오래 살았지


거기 살다가, 너는 최가니께, 저 웃도네 아래 두부 해가지고 오는 할아버지 있어

우리 할아버지 동생이여 말하자면

그래 가지고, 사는데 

아이고, 그래, 장가를 가야 된다는겨

그래서 장가를 보내주더라고


논 두 마지기뿐이 없었어

내가 팔아먹었지만, 거기 땅 2만 원에 팔았어

농사를 짓는데, 애들이 다섯이여

재영(막내삼촌)이만 여기 와서 났어

농사를 짓다가 34살에 농사 지며 살아서 대전으로 와서

여기를 왔는데


참 그때나 지금이나 취직 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여

그래 가지고,  나 34살에 나왔으니께 꼭 50년이여 여기 나온 지가

 



이야기가 갑자기 급전개 되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작은 아버지에게 시달리다가

집을 나왔고

외갓집에 가서 18살까지 있다가

그때에 장가를 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34까지 고모들과 삼촌, 아빠까지 5남매를 났고

대전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올해가 대전으로 나온 지 50년이 되는 해였다.

따져보자면, 할아버지가 대전으로 온 것은 1969년도가 된다.


내가 보기에도, 할아버지는 원체 겁이 많지만 욕심도 많으신 분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속일지언정 남은 속이시진 않는다.

다만 자신을 확실히 속이기 때문에

남에게는 거짓말 치려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

할아버지 스스로는 한 점 부끄럼이 없으신 분이다.


그런 분이 대전이라는 군소 도시에 나오게 된 배경에는 분명

여러 사람들의 입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의 성공"을 목적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옮겨가던 시류를 타고 흘러가신 것이리라.


하지만, 도시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남들의 성공과

욕심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든 곳이 그때의 대전이었으니 말이다.




애들 또 하나 생겨서 재영이를 낳자나, 다섯은 도내서 나서 하나는 여기서 났고

그래 여섯을 난겨

여섯을 나가지고


애들 다 먹을라고만 하고, 돈 버는 것은 없고,

우리 내외 있고 여덟 식구, 참 그때는 춥고 배고플 때나

나는 구르마 끌었지 이렇게 해서 사는데


아이고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기가 맥혀

방도 안 줘, 식구들 많다고 시끄럽다고

그래서 문창동에다가 방을

도내서 여기 나올 때 만 오백 원짜리 방을 얻었어

충무체육관 갈려면 다리 있지

올라가다 보면

석교동 쪽으로 도로가 이렇게 났지만

거기 그냥 학고방(판자집) 집이 너져분 했어

거기다가 만 오백 원 주고

여기 와서 살라니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 어떻게 

그래서 도내서 빛을 얻어서

거기서 만 원짜리 방을 얻은겨

갸 안 죽고, 연탄 땔 때여 그때는 


그런 속에서 방 한 칸에서 자고 있는데

어제 아래 전화했던 처남이여, 그 사람이 왔어 거기서 잔다는 겨

내 식구도 여덟인데, 아홉 식구

근데 어떻게 처남인데

너 할마이의 동생이여

어떻게 할 수가 없지


그래서 천일 화물에 댕기고

거길 누가 해주었느냐

순철이 엄머라고 나보다 한 살 밑이여

그가 나를 취직을 시켜줬어

3년이 있다가 화물이 망했어


갈 수도 없고, 아이고,

장갑 장사를 시작을 했지

장갑 장사를 시작해서 , 밑거름이 된겨 천인화물에 댕길 때

가만히 볼 떄, 배달료를 먹는데

배달료를 돌라면, 이거 얼매여 하면 물건을 적여서 나와

두말 안 하고 줘

공장까지 가져가면


내가 납품 생활 오래 한 사람이여

그래 가지고, 공업단지 공장에 돌아다니면서 아니께 사람들을 천인 화물 뎅길 때 알아서

내가 좀 팔아달라고 "예, 그래요" 그래


그래서 그 바닥이 돼서, 도저히 이렇게 해가지고 밥 먹기도 대간하고

그래서 막 고철, 고물을 공장에서 끓어 냈잖아 

그런 거 싥고가서 연탄공장에 주는겨


아무것도 없이, 집 한 체 장만한다는 게 이 집 한 채 만든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겨




순철이 어머니의 도움으로, 천일 화물에 취직한 할아버지는

그때의 경험과 인맥을 밑천 삼어

장갑 장사를 시작하셨다. 

공장에서 장갑을 때와서, 현장에 파는 일인데

그 수수료로 먹고 사신 것이다.


결국에 하고 싶으신 말은

어렵게 살았고

집 한 채 장만하기가 이만큼 힘드셨다는 이야기셨다.


이 부분부터는 소위 팩트체크가 필요하다.

고모와 삼촌들의 기억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일한 날보다, 일하지 않았던 날들이 더 많았다.

또한, 여기저기 주식에 도박에, 오입질에 돈을 쓰시면서 집에 돈을 가져다주지 않았고

삼촌과 고모들은 많이, 엄청 많이 굶었다고 한다.


또한, 집을 장만한 것에 대해서도

할아버지 본인의 힘만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첫째 고모와, 아빠 등 가족들이 공동으로 빛을 내서 장만한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삶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할아버지의 거짓말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에는

단지 외로워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아무 편이 없는 지금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하여

나에게 자신도 모르게 편향된 정보만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너 할머니가 차에 갈려 죽고

네 애비는 또 장가를 간대


"그때는 장가를 간 이후죠" 내가 말했다.


내가 지금 왔다 갔다 해

그럴껴, 지금, 내가 지금 말도 잘 못 혀


문창동서 살다가, 집을 산 겨 

빛을 얻다시피 해서 그놈을 사 가지고 간 거지


죽네, 할머이가

아이고 내 팔자가 왜 이러냐

그래 가지고, 참, 머시어


내가 춤을 배웠어 

저런 데 가서 춤을 배우니까

마누라가 없어도 외롭지 않더라고


"주식도 하셨다면서여"


주식도 해야 되지도 않고

오죽하면, 너 데리고 홍명상가 데리고 가서

하도 안돼서, 나보고 뽑으라고 했었어

그리고도 잘 안됐어

됐는가 안됐는가 기억도 안나


장사도 참 많이 하고

아이고

나 산 게 복이 없어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외로움 때문에

춤을 배우셨다고 하셨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살아계실 적부터

춤을 추러 다니기 시작하셨다.


삼촌의 기억에 따르면, 그 당시 대전에 어느 지역이 춤을 추는 곳으로 유명했는데

자신은 할아버지가 바람피우는 것을 마주칠까 두려워

친구들과 놀 때, 그곳 근처로 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춤을 추러 다니셨다는 것은

"오입질"할 대상을 찾으러 다니셨다는 말과 동일하다.


또한, 그 당시에 할머니를 많이 때렸다는 고모와 삼촌들의 증언이 있었다.

한 날은 주먹으로 할머니의 얼굴을 때려서

할머니의 눈이 시퍼렀게 멍들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있었던 어느 친척의 결혼식 날

할머니의 남매들 중 한 분이, 할아버지에게 와서 

"네가 어떻게 내 동생한테 그럴 수 있냐, 이 개노무 자식아 니가 뭔데 여길 와"

라며 할아버지 앞에서 오열했던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당시의 내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의 얼굴을 붉어져 있었고

"아니 왜 그래" 하시면서 고개를 돌리셨다.


그래도 자신이 했었던 행동에 대해서 일말의 부끄러움은 있으셨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여기 있는 고모는 바로 밑에 동생이여


"예 고모할머니"


시골에 또 하나 있어 다 죽어 간댜

갸가 78인가이고

거기도 가 봐야 하고

내 몸뚱이가 이러니

나 말도 자꾸 못 하고 있어

이렇게 앉아 있으면 자꾸 까무러져


그래서 어제 아래 보은서

저번에 저기 보은하고 고모할머니가 들기름 하고 돈도 10만 원 가져다주고 김치도 주고

너네 아빠가 이십만 원 주고


그래서 내가 30만 원을 예금을 했어

30만 원을 했는데


노령연금 나오는 걸 써야겠다

노령연금 나오면은 이제 그거 쓰고 모자라면 그거 쓰면 돼


내가 지금 말이 정신이 없고,

그래서 어제는 목욕 갔다 오고



한 동안 오시지 않았던 고모할머니도


그래도 가족이라고, 자식들과 연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빠 걱정에 오신 것이었다.


아빠는 나에게 할아버지를 주라며 20만 원을 줬다.

아빠도 할아버지를 안 본 지 이제 거의 1년 반이 넘어간다.

큰고모도 그렇고

그나마 오던 큰 삼촌은 이제 아프니

할아버지의 속도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다만, 할아버지가 속을 타는 이유는, 자식 걱정은 아닐 것이다.





고종사촌 누님이여 안형사라고 하면 너 모를껴

누님, 나 물견 사야 하는데 돈이 없어

공장에 가져다줘야 하는데 없어

그 누나는 돈을 잘 벌었어 꾸어다가 해서 공업단지 가져다주고

내 장사를 33년을 했다.


"장갑만요?"


장갑만 해서 안돼, 고물도 끌어내고, 장갑도 면장갑만이 아니라 종류가 한 20가지가 돼


"얼마나 주는데요?"


예를 들어서 10개에 , 1개에 백오십 원 하면, 170~180원에 팔어 

천 켤래 얼마여 몇 ㄴ천켤래 들어가는 곳도 있으니까

그런 장사해서

73까지 했어, 아이 33년 했으니께


그래도 내가 장사 손 놓을 적에

네 어머이한테 상의를 했어

내가 73까지 했으니, 물건 하는 직원들이 그만하라고 한다

그래서 그만해야겠다.

다 떨어지고 3군데 남았었는데

너희 어머이가 상의를 해서 그만한다고

73까지 했어

그래서 내가 인제 손 놓은 지가 11년뿐이 안됐어.


아이고 그래 가지고 이렇게 사는데 

아이고 못살겄어

...


너 지금 학교 댕겨?"

지금 올해 하면 졸업하는 거지?

그럼 졸업하면 취업하는 거지?


"..."


입 짜거운거 만 없어져도 내가 살겠는데

밥맛을 몰라


그래서 자고 뭐여 삼촌 때문에 큰일 났네

이게 다 니네 엄마가 집에 나가..


"목소리 들어보니 괜찮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전 들어가서 잘게요. 주무세요"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재빨리, 능숙하게 끊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들어줄 필요도, 들어줘서 아무도 좋지 않은 이야기니.


할아버지의 마지막 질문으로도 알 수 있듯이

할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걱정

나에 대한 걱정은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귀결된다.

돈을 쟁여 놓고도, 틈만 나면 큰삼촌에게 전화해서

"돈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의 학위나, 나의 취업 역시 할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삶을 증명하고 누릴 수 있는

수단으로 환산될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무엇인가 바라는 것은 없다.

다만 나는 할아버지를 보고 관찰할 뿐이다.

삶의 가능성 중 하나를 몸소 표현해 주시고 계신다.

일부로 그러시는 듯

자신의 삶에 대해 "복이 없다"라고 일축하시는 것처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반어적으로, 직접적으로 

나에게 가르침을 주신다.


나 스스로에게 손자로서의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고 싶지 않다.


독거청년으로서 독거노인이 될 준비를 하며

할아버지에게는 그나마 괜찮은 손자로 비춰지길

바랄 뿐이다.


이것도, 나의 욕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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