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를 대하는 나의 자세
0.
나는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할아버지한테 좀 살갑게 말해 줄 수 없어?"
할아버지에게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차 있었다.
하도 둘이 싸우니, 그나마 말이 통하는 엄마에게 양보를 제안한 것이었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집을 나가고
할아버지와 단 둘이 남고 나서야
나는 엄마에게 했던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할아버지를 대하는 나의 목소리엔 엄마의 목소리보다도 더한 짜증만이 남아 있었다.
1.
처음에는 아니었다.
착한 손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마음은 어떤 조건에서 곰팡이처럼 번져 나간다.
같은 곳에 있었지만, 엄마와 나는 다른 공간에 있었던 것이다.
엄마의 짜증은 곰팡이처럼 번져 나간 것뿐이었다.
그 공간에는 항상 비가 내렸고, 빛은 들지 않았을 것이었다.
내 무심한 말도 차갑게 그 습도를 유지시켰을 것이다.
새삼스레 대단하다는 생각
2년도 안된 시간 동안
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공간에는 곰팡이가 가득 차 숨쉬기도 답답한 곳이 되어버렸는데.
다행이다. 이제라도 이 공간을 엄마의 세계에서 멀리 내보낼 수 있어서.
2.
착한 손자가 되고 싶지도
착한 손자로 보이고 싶지도 않다.
누가 뭐라고 한다면 무시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이 공간의 중력을, 습도를, 온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니까.
엄마에게 훈수 두던 나처럼.
3.
할아버지의 말은 거의 듣지 않는다.
그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를 화나게 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들만
내가 해주고 싶은 것들만을 해준다.
큰소리를 내면, 나는 더 큰소리를 낸다.
되지도 않는 소리로 협박을 하면, 나도 집을 나갈 것이라고 맞불을 둔다.
외롭고, 무섭다고 하소연하면, 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라 화답한다.
4.
아무리 악의 없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나를 사람이 아닌 자신의 손자로만 보는 그는
그저, 죽음에 가까운 동거인일 뿐이다.
그와 나 사이의 공간은 여전히 습하지만
부셔버린 벽으로
그나마 통하는 바람이
곰팡이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5.
엄마의 표정이 밝다.
나는 그것이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