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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라샘 Oct 31. 2024

엄마를 원망할까 사랑할까

내 인생의 롤모델


그 짧은 시간. 엄마는 내가 좀 컸다고 일에 더 몰두하셨고 난 머리 컸다고 방임한 엄마를 원망했던 그 사춘기시절. 그런데 어린 고오를 키우며 나도 모르게 엄마와 같은 행동과 양육을 하는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과거의 엄마를 되새김질하고 엄마가 준 사랑으로 아니 겨우 흉내를 내며 고오를 키우고 있다.  

크면서 엄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철없는 꼬꼬마시절 물건을 깨뜨리고, 인형옷을 만든다고 언니옷을 싹둑 잘랐어도, 혼자 밥 짓는다고 설치다 쌀을 하수구에 한 바가지 버린 날에도. 그렇게 나의 모든 실수와 잘못에 엄마의 잔소리와 큰소리는 없었다. 대신 "아가, 안 다쳤냐?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며 자상한 어투의 짧은 말이 전부였고 나의 자잘한 모든 도전과 실패를 모른 척해주셨다. 되려 잘못에 대한 죄책감에 혼자 몸 둘 바를 모르던 감성만 남아있다. 김창욱강연자가 꿈꾸던 이상적인 엄마의 모습을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물건을 깨뜨린 아이에게 "오마갓! 아유 오케? 돈 프라브럼" 그 말을 해 줄 친엄마를 기다렸다고. 그 말에 관객석은 빵 터졌고 난 '어, 우리 엄만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는 부족한 듯 참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전라도가 섬마을이 고향인 엄마는 시대를 앞선 큰 키와 외모로 일 흔이 넘은 지금도 참 고우시다. 

80년대. 가난한 아빠를 따라 낯선 부산으로 이사와 사 남매를 업고 걸으키며 어묵공장, 막걸리공장, 식당을 다니며 정말 악착같이 일하셨다. 시대가 그러하듯 자식도, 돈도 모두가 중요한 시기였고 모든 것에 매달려야 살아갈 수 있던 때였으니 엄마 역시 그 시대의 보통의 엄마들처럼 억척스러움이 내면에 장착되어 있었다. 엄마는 손이 야무져 음식도, 살림도 못하는 게 없었고 자식들이 먹고 싶은 게 있다 하면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낼 정도로 솜씨가 좋으셨다. 사업 수환도 좋아 엄마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 각자의 꿈을 키우며 IMF가 터지기 직전까지 호의호식하며 자랐다. 

그리고 엄마는 노래를 참 잘하셨는데 한 번 들은 노래는 가사까지 다 기억하고 장구며 창이며 음악적인 재능이 남달랐었다. 60세 때 고작 3개월 배운 색소폰으로 가수 신유 팬미팅 무대에 설 정도였으니 재능이 넘치고 손재주도 많은 타고난 예인이셨다. 엄마의 고향이 섬마을이 아니라 도시였다면 어땠을까? 시대를 잘 못 태어나신 건지, 제대로 한 시대를 풍미하신 건지 엄마의 굴곡진 인생을 되짚어 보면 나도 쉽사리 정의하긴 어렵다.

무엇보다 나에게 있어 고오를 키우는 데 있어 엄마가 핵심적인 영향을 준건 확실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언니가 엄마에게 네 살짜리 조카 민서를 맡긴 어느 날. 엄마와 내가 한눈 판 사이 민서가 설쳐대다 결국 큰 항아리를 깨뜨렸다. 그쪽으로 가지 말라던 나의 주의를 무시하고 막 뛰어다니다 결국 사달이 난 것이다. 몇 번을 말했었는데 말도 안 듣고 그 큰 걸 깨뜨리니 정말 화가 났다. 

"엄마! 엄마! 민서가 이거 깨뜨렸어!"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던 날 보고 민서는 가슴을 졸여했고 나는 계속 씩씩대고 있었다.

"아이고, 아가 괜찮냐? 많이 놀랬지? 조금 떨어져 있어 할머니가 치울게."

민서를 달래주고 바로 수습하는 엄마에게 되려 속상한 마음에 내가 소리를 높였다.

"엄마는 화도 안 나? 이거 아끼던 거잖아. 아까부터 뛰지 말라고 그리 얘기했는데 진짜..." 흥분된 나의 말에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미 깨진 거 애 잡는다고 다시 붙는데? 안 다쳤으면 다행이지, 뭔 큰 일이라고. 애 노는데 이런 거 앞에 놔둔 어른 잘못이제. 너도 손대지 말고 저만치 가 있어"   

그렇게 차분하게 말씀하신 상황이 아직도 뚜렷이 기억난다. 그때의 내 감정은 민서에게 부끄러웠고 엄마에게 고마웠다. 나도 이렇게 키우셨겠구나 하고. 

 잔소리도 없었고, 실수에 관대하고, 못하면 기다려주고, 혼자만의 시간을 존중해 주던 엄마의 모습. 내가 유서일기를 썼던 그 시절, 엄마는 정말 바쁘셨다. 그냥 단편적인 그 시기의 엄마를 생각하면 방임자라 원망을 하겠지만(했었지만) 나의 모든 미술공부를 지원해 주셨고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본인의 인생을 살아오신 분. 나는 미련하게도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야 엄마의 큰 사랑을 알게 되었다.  


곧 맞이할 고오의 사춘기. 나의 사춘기시절의 엄마와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왠지 모르게 다 싫었던 나 날. 웬일로 저녁을 하는 엄마의 뒷모습도 싫고 다 두고 빨리 일 나가셨으면 좋겠고 괜스레 미웠고 짜증이 났었다. 그 순간 "밥 먹어라" 라며 식탁에 밥을 차려주신 자상한 엄마의 말에 

"싫어!" 하고 고함치며 방으로 쾅하고 들어갔었다. 내심 무슨 버르장머리냐고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고 쫓아 들어올 엄마를 상상하며 그 짧은 시간 대꾸할 반항의 대사를 머릿속에 가득 담고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맞설 수 있었고 맞서고 싶었다. 그런데 문 밖에서 엄마의 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중에 먹어"

지금 생각해 보면 뻘쭘이란 단어로 그때의 심정을 표현할 수 있겠다. 그 이후 반항은 없었다. 엄마는 반항이 통할 사람도 아니었고 할 이유도 없었다. 나도 고오가 사춘기가 되면 그리 키우리라. 흡수하지도 말고, 받아치지도 말고, 그냥 지켜보리라. 엄마가 그랬으니 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다짐한다.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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